[아츠앤컬쳐]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은 평범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예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란 인물이다. 내성적이고 말이 별로 없던 드보르작은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베토벤을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드보르작이 부인 안나와 결혼한 것은 32살 때인 1873년이었다. 몹시도 가정적이었던 드보르작은 집안의 부엌에서 작곡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행복한 가정생활에 빠져든 작곡가는 가정의 푸근한 분위기에서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계속해서 높여갈 수 있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는 브람스의 도움으로 <모라바 2중창곡>을 출판하여 성공의 가속도를 높여갔다. 그 후에 발표한 <슬라브 무곡집>은 드보르작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유럽의 유명작곡가로 50세를 맞이한 드보르작에게 놀라운 제안서가 하나 도착했다. 어느 부유한 음악애호가가 설립한 뉴욕국립음악원의 초대원장을 맡아주면 1만5천 달러라는 파격적인 보수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작곡과 교수 월급의 몇 배가 되는 거액의 급료는 물론이고 4개월에 걸친 휴가까지 보장하는 뿌리치기 힘든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들을 내세워 드보르작을 유혹한 사람은 열렬한 음악 애호가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자넷 서버라는 여성이었다. 한 동안 고민하던 드보르작은 결국 원장직을 수락하고 1892년 9월에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드보르작은 1892년 51세의 나이에 뉴욕 국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신대륙에서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그의 뉴욕행에는 아내와 아이들도 동행하여 미국에서의 생활을 함께했다. 뉴욕에서 드보르작은 매일 아침 센트럴 파크나 항구까지 산책을 즐긴 후에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조용한 밤 시간을 집에서 즐겼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고향과 조국에 대한 향수병은 조금씩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또 하나의 초대장이 아이오와주 스필빌에서 날아왔다. 이 작은 도시는 보헤미아 지방에서 온 이민자들이 살고 있던 도시였다. 반갑게도 초대장은 동포들이 보낸 것이었다. 동포들이 사는 스필빌을 방문한 드보르작은 이곳에서 모국어로 말할 수 있었고 교회에 나가 조국에서 부르던 그리운 성가들을 부를 수 있었다. 어떨 때는 체코인들의 축제도 열려서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등 갖가지 즐거움을 누렸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체코인 마을을 찾은 드보르작은 완전히 고향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당시 드보르작이 쓴 교향곡의 많은 부분도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뉴욕에 있는 동안에는 향수병에 무척이나 시달렸으나 뜻밖에도 스필빌에서 동족들을 만나 많은 에너지를 얻은 것이었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신세계로부터>는 미국 체류 중에 작곡된 것이다. 작곡가 자신은 “미국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교향곡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광활한 자연과 대도시의 활기, 고향에 대한 상념 등이 담긴 이 교향곡은 52세가 되던 1893년 1월 10일에 착수되어 5월에 24일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15일에 카네기 홀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은 작곡가의 생애 최고라 할 수 있을 만큼 대성공이었으며, 이듬해에 유럽에서 악보가 출판될 때는 작곡가와 절친한 브람스가 교정을 도와주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3년 만에 드보르작은 프라하로 돌아왔다. 그는 아름답고 조그마한 고향의 마을을 몹시도 그리워했다고 한다. 금의환향을 한 그였지만 그에게서 변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소박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으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교향곡 <신세계로부터>의 공연으로 뉴욕에 이어 보스턴과 빈에서도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 드보르작의 입에서 나온 짤막한 한 마디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였다고 한다. 그는 정말로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인생과 예술을 추구했던 세계의 명사였다.
글 | 이석렬
2015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5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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