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오지레이스 Ultra ASIA Race 2016
[아츠앤컬쳐] 베트남 오지마을 Pa Co의 새벽 정적을 흔드는 반란이 시작됐다. 인간 누구도 수탉과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막을 수 없다. 여명이 밝아오자 마을로 날아든 날짐승들까지 합세한다. 마치 기 싸움을 하듯 새벽 4시부터 시작된 녀석들의 아우성은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이렇게 새벽 문이 열렸다. 그래서 새벽이 Daybreak인가보다.
정도가 아니라고 일탈은 아니다. 이제껏 15년 동안 달려온 거친 길도 길이 되었다. 넘어져 봐야 일어날 줄도 안다. 아파 봐야 내 몸도 더 챙긴다. 굶어봐야 배고픔도 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벌거벗은 나를 가장 솔직하게 만날 수 있는 곳에 내가 섰다. 위기는 기회, 절망 속엔 늘 숨겨진 희망이 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무언가 나를 주저앉히려 할수록 나는 더 강해졌다.
베트남 오지 레이스 둘째 날, 달팽이관을 따라가듯 산허리를 빙빙 돌며 산 정상으로 올랐다. 허벅지가 뻣뻣해지면서 다리가 들리지 않았다. 운동부족으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오르던 길을 멈추고 서서 흐르는 땀줄기를 훔쳤다. 진공상태에 빠져 현기증이 왔다. 심장이 폭발할 듯 꿈틀거리는 나 자신을 다독거렸다. ‘흔들려도 쓰러지지 말자.’ ‘너는 이곳을 넘어설 능력이 충분히 있어.’48km 전 구간 중 3km의 유일한 내리막 포장도로를 따라 오후 5시 27분 캠프에 발을 들였다. 제한시간을 불과 3분 남겨놓고….
15년간의 오지레이스 중 처음으로 꼴찌를 경험했다. 경기 탈락을 면하기 위해 시간에 쫓겨 바둥거리는 선수의 심정을 오늘 알았다. 간혹 ‘꼴찌에게 보내는 찬사’를 말하며 즐겨볼 만한 체험이라고 하지만 일부러 더디 가는 선수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서툴고 불편하다. 하물며 오지는 가혹하고 혹독하다. 때로는 잔혹하기까지 하다. 레이스 셋째 날, 안개비를 뚫고 산기슭을 기어올랐다. 오전 11시, 간신히 CP2(16km)를 통과했다. 운영진의 설명대로라면 캠프(35km)까지 구간은 대회 전체를 통틀어 난이도가 가장 힘든 구간이었다. 지도상으로 분명 이 산을 수직 능선과 계곡을 번갈아가며 치고 올라가야 했다.
선수 모두 이 구간을 피해가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푯대가 가리키는 대로, 가라는 데로만 달려야 했다. 계속된 레이스로 발가락은 모두 물집이 잡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전해오는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심장이 폭발의 한계를 넘었다. 날개는 남이 달아주는 것이 아니다. 내 살을 뚫고 스스로 나오는 것이다. ‘너는 오늘도 그 힘든 여정을 잘 견뎌냈다.’ 고통은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고통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멀리 캠프가 시야에 들어오자 종일 일그러졌던 내 얼굴이 환한 웃음으로 변했다.
사막과 오지를 달릴 때 종종 두 눈을 부릅떠야 할 때가 있다. 갈림길에 다다르면 두 다리보다 긴장감이 먼저 앞섰다. 지난 사흘 동안 가혹한 선행학습으로 얻은 습관이다. 피로와 참담함이 누적되면 사기까지 떨어진다. 호기를 부리거나 허둥대며 시간을 허비할 바에는 차라리 늦더라도 제 길을 찾아가는 편이 났다. 당황하면 길이 보이지 않지만 사실 길 표시는 다 되어있다. 당황과 호기가 우리의 눈을 가릴 뿐이다.
레이스 마지막 날, 밀림에 묻혀 눈을 부라리고 표식을 찾아 헤맸다. 수로를 넘고 농로를 따라 달렸다. 벌떼에 놀라 줄행랑을 치고 개떼에 쫓기기 일쑤였다. 여전히 길을 잃고, 길을 묻고, 길을 찾았다. CP2로 가는 여정은 오지에서 겪을 수 있는 자연 환경이 총 망라된 결정체였다. 능선과 협곡을 수차례 건너다 정오를 맞았다. 간혹 밟아보는 임도는 너무 짧았다. 정오를 넘어서자 작렬하는 태양열에 제한시간에 대한 압박까지 더해졌다.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내가 힘든 만큼 누군가에게 희망이 쌓이기 때문이었다.
오후 1시 50분, 30km지점 CP2를 통과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결승선에 더욱 바짝 다가섰다. 마음은 벌써 인천공항 입국심사대에 서 있었다. 들뜬 마음에 CP2의 진행요원에게 결승선이 있는 마이 차우(Mai Châu)에서 하노이 국제공항까지 이동 시간을 물었다. 그런데 도로 사정이 안 좋아 4시간이 넘게 걸릴 거라는 뜻밖의 말을 듣고 나는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나머지 구간에서 길을 잃거나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면 귀국행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밤 11시 10분발 비행기를 타려면 늦어도 오후 4시까지 결승선에 도착해야 했다. 죽기 살기로 달렸지만 비행기를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신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34km부터 다시 밀림으로 빨려 들어갔다. 속이 느글거리고 입은 식량을 거부했다. 물도 먹히지 않았다. 허기는 온몸을 무기력하게 했다. 가슴이 조여 오면서 두통까지 났다. ‘여기 주저앉아도 나를 구해 줄 사람은 없다.’ 거친 숨을 골랐다. 지금 포기하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기도했다. ‘나의 열정을 가상히 여기시고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배낭을 풀어헤쳐 미친 듯이 아스피린을 찾아 입에 삼켰다.
언제부턴가 그랬다. 주로에 서면 나에 대한 관대함은 없다. 몸이 부서져도 상관없다. 무식하다 비난해도 상관없다. 세상에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그 일이 가능한 일이건 불가능한 일이건 간에 말이다. 새벽마다 목청껏 울어대는 미물에게 삶의 지혜를 얻었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 가장 값진 나의 선택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일,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조금 더 가봐야겠다.
어느덧 50대 중반, 세월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지만 그래도 견딜 만하다. 내일 이야기할 수 있는 오늘의 추억이 쌓였기 때문이다. 인생은 채우고 비움의 연속이다. 고난의 행군 속에 다 비우고 나니 가장 단순한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무엇을 비우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고,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는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조금씩 쌓이다 보면 채움도 비움도 없는 진정한 내 모습이 만들어지겠지. 나는 오늘도 내일을 꿈꾼다. 오늘은 나에게 남은 인생 중에 가장 젊은 날이다.
오지레이서 | 김경수
서울강북구청(팀장) 근무, 선거연수원초빙교수, 제31회 청백봉사상 수상,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후회없는 인생이다> 출간, 블랙야크 셰르파
gskim3@gangbuk.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