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오지레이스
[아츠앤컬쳐] 베트남 오지마을 Pa Co의 새벽 정적을 흔드는 반란이 시작됐다. 인간 누구도 수탉과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막을 수 없다. 여명이 밝아오자 마을로 날아든 날짐승들까지 합세한다. 마치 기 싸움을 하듯 새벽 4시부터 시작된 녀석들의 아우성은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이렇게 새벽 문이 열렸다. 그래서 새벽이 Daybreak인가보다.
어제는 서울에서, 오늘은 베트남 오지 속 오지로 잠자리가 바뀌었다. 몸을 좌우로 뒤척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늑장을 부렸다가는 화장실 쟁탈전에서 밀릴 게 뻔했다. 느긋하게 속을 비우고 신선한 천연의 대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복잡한 일상을 접고 이 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여유로운 마음의 평정도 잠시, 쌓인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Ultra ASIA Race 2016>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것이 직장인 모험가가 감수해야 하는 남모를 애환이다.
일찌감치 아침을 챙겨 먹은 선수들이 원주민 숙소의 캠프를 벗어나 하나 둘 마을 공터에 설치된 경기 출발선상에 모였다. 선수들은 곧이어 펼쳐질 3박4일 160km 고난의 행군을 애써 잊으려는 듯 격려와 덕담, 환호로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수시로 컨디션을 묻고 챙겨주는 닥터 토마스도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와는 2010년 호주 아웃백 530km 레이스 때부터 인연을 맺으며 나이와 국적을 넘어선 절친이 되었다.
2016년 3월 20일 일요일 오전 8시, 경기 운영자인 제롬의 출발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상기된 선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앞 다퉈 출발선을 뛰쳐나갔다. 주로 표시의 분홍 리본을 쫓는 선수들의 모습이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을 신작로를 벗어나 논두렁과 밭두렁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주로는 이내 급경사의 임도로 이어졌다. 4일치 식량과 장비로 꽉 채운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협곡과 능선의 너덜지역을 몇 차례 오르내리자 선수들은 혼이 빠진 듯 하나같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CP1에 도착하기도 전에 무려 7명의 선수들이 줄줄이 길을 잃었다. 앞선 선수를 무작정 쫓는 건 자기 품을 들이지 않고 얹혀가는 것과 같다. 주로에 서면 방향 표시를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갈림길에선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런 걸 모를 리 없는 베테랑 선수들이 오죽했으면 주로를 이탈했을까. 오전 9시 55분, 스타트의 기분이 유지된 덕에 여유 있게 11km 지점의 CP1을 통과했다.
베트남의 산야는 더없이 아름답고 고즈넉했다. 수목 울창한 산야와 논밭 빼곡한 전원의 모습은 한국의 농촌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두발로 다가선 산세는 가히 히말라야의 굵은 지맥이 발톱을 숨긴 듯 거칠고 험했다. 오르막 인생엔 나락이 있듯 CP2로 향하는 레이스 내내 내리꽂는 급경사가 이어졌다. 내리막은 힘을 덜 들이며 속도를 놓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가락이 가운데로 쏠리며 전해오는 압박과 통증을 감수해야 한다.
산속에서 한참을 헤매다 임도를 따라 다시 마을 어귀로 내려왔다. 갈림길에서 잠시 머뭇거릴 즘 반대편에서 6명의 선수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또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속도 경쟁이 부른 가혹한 대가였다. 베트남의 결혼 풍속은 지나가는 행인에게도 음식을 제공하는 모양이다. 혼주쯤 되 보이는 노인이 음식을 먹고 가라며 연신 손짓을 했다. 몇 차례 길을 잃어 시간이 지체된 터라 호의를 마다했지만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거친 숲과 날 선 자갈밭이 펼쳐진 산악 지역으로 들어섰다. 허벅지가 땡땡해지면서 어지럼증까지 왔다. 어디든 드러눕고 싶었지만 마땅치 않았다. 오후 12시 30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가까스로 21km지점 CP2에 도착했다. 닥터 토마스가 염려스런 표정으로 나를 부축했다.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하려 용을 썼지만, 몸을 가누기도 벅찼다.
15년째 사막과 오지를 달려왔지만 나는 아직도 내세울 만한 비장의 노하우 하나 없다. 더군다나 대회마다 맞닥뜨린 상황도 매번 너무 다르다. 급격히 떨어진 체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냥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 고아원 건립 모금행사 때문에 포기도 쉽게 내키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자존심과 이기심이 나를 부추겼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일으켜 세워 다시 주로에 섰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다시 힘을 내자. 비장한 마음으로. 조금만 더 격하게.’
캠프가 가까워져 오면 다가서는 느낌이 있다. 운영진의 잦은 출몰과 원주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캠프 입구에서 나를 알아차린 제롬이 두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보냈다. 누군가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을 안겨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격한 박수와 응원에 두 다리에 다시 힘이 붙었다. 오후 2시 30분, 한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캠프(30km)에 도착했다. 나 자신에게 지독히 치열했던 첫날 레이스를 마쳤다.
캠프 한 켠에 드러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몽롱한 무의식에 빠져 다시 주로를 달렸다. 3번이나 길을 잃었다. 방심한 것도, 자만한 것도 아니다. 비표시를 떼어간 원주민 아이들 탓도 아니다. 무턱대고 앞 선수를 쫓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너무 긴장한 탓도 없지 않다. 첫날부터 환자가 속출했다. 덕분에 연세 지긋한 닥터 토마스의 손길이 바빠졌다. 엄지발톱이 벌어져 너덜거리는 선수, 발뒤꿈치가 물집으로 질컥거리는 선수. 내 발톱도 2개가 죽었다. 내일은 이번 대회 최장의 레이스 48km가 기다리고 있다. 레이스 중에 보충할 식량을 챙겨 손에 잘 닿는 배낭 주머니에 넣었다. 캠프에서 오늘의 여정을 더듬어 상기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계속>
오지레이서 | 김경수
서울강북구청(팀장) 근무, 선거연수원초빙교수, 제31회 청백봉사상 수상,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후회없는 인생이다> 출간, 블랙야크 셰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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