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최근 뚱뚱한 여주인공이 유명 트레이너(사실 갑부집 아들)를 만나 다이어트를 하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게 됐는데 드라마 제목에 ‘비너스’가 등장한다. 비너스는 사실 서양 신화 속 여신임에도 그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바로 아름다움이 떠오를 정도로 친근한 이름이다. 어린 시절 지겹도록 들었던 수많은 광고음악 중에서도 ‘사랑의 비너스’라는 짧은 멜로디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로마 여신을 처음 알게 된 경로치고는 참 소박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을 늘 하곤 한다.
텔레비전 바깥의 비너스는 어떠한가? 미(美)의 여신답게 비너스는 예술작품의 단골 소재이다. 피렌체의 우피치(Uffici)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르네상스의 명작 중에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5)’과 ‘봄(1478)’이 있는데 특별히 이 작품들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작품 중 메디치 가문의 주문으로 탄생한 보티첼리 초기 대표작 ‘봄’을 보면 중앙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비너스의 머리 위에 눈을 가린 채 활을 쏘는 아기천사가 있는데, 그가 바로 비너스의 아들이자 사랑의 전령인 큐피드이다. 큐피드가 쏜 화살에 맞는 자는 상대를 불문하고 반드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중요한 화살을 쏘는 큐피드의 눈은 가려져 있다. 사랑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의미다.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소재이다 보니 흔한 러브스토리들은 때로 세속적이고 저급한 취급까지 받기도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야말로 신들의 사랑과 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케이스의 연애 스토리와 불륜까지 담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신이고 인간이고 간에 모든 남성 캐릭터들의 사랑을 받고 심심치 않게 납치까지 당하곤 한다. 21세기 지금 기준으로도 사회 1면을 장식할 이야기들이 잔뜩 묘사되어있다. 신이고 괴물이고 잘생긴 남자건 추한 남자건 모두 미인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의 역사책 같은 느낌이랄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시작되면서 초기에 주로 담았던 내용들이 그리스의 신화들이었는데 이후 바로크 시대에는 대본을 만들 때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을 조금씩 다르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예로 셰익스피어의 시를 대본 삼아 제작된 3막 오페라 <Venus & Adonis>는 영국의 찰스 2세를 위해 1683년 작곡가 존 블로우(John Blow,1649~1708)에 의해 작곡되었다(당시 잘나가던 프랑스 작곡가 륄리의 오페라 형태를 여기저기서 많이 참조했는데 이 작품도 형식적인 면에서 프랑스풍이었다.).
작곡가 존 블로우는 원래의 스토리에서 약간 변형을 주어 아들 큐피드의 화살에 실수로 상처를 입게 된 비너스가 잘생기고 어린 아도니스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내용과 아도니스의 비극적 죽음을 그렸는데, 비너스가 아도니스를 사냥에 나가도록 등 떠미는 장면이 신화에서 조금 변형된 내용이다. 결국 아도니스는 엄청나게 큰 멧돼지에게 상처를 입고 비너스에게 돌아와 비너스의 품에서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도니스를 공격한 멧돼지는 비너스를 사랑하는 다른 신이 모습을 바꾼 것이다. 이때부터 비너스의 이미지가 다중화되었는데 1845년 드레스덴에서 올린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서 비너스는 심지어 남성을 유혹하는 타락의 이미지까지 표현하게 된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파리 첫 방문 때 Ludwig Lucas라는 사람이 발표한 독일 음유시인의 전설에 대한 논문(1836)을 접하면서 영감을 얻어 이후 독일로 돌아오자마자 대본을 만들어 당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전폭적 지원 아래 파리에서까지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탄호이저>의 배경은 13세기 중세 독일이며, 14세기에 한참 유행하던 음유시인들의 사랑이야기와 그리스 로마의 전설을 융합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바그너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오페라는 파리에서 폭삭 망했지만.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이야기는 한참 더 세월이 흐른 뒤에 스트라빈스키의 영어 오페라 <The Rake’s Progress(1951,Venice La fenice)>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톰 레이크웰’의 입을 통해 부활한다. 톰은 정신병원에서 자기 자신을 ‘아도니스’로 착각하고 ‘비너스’는 어디 있느냐며 애타게 찾다가 죽어간다. 이렇듯 그림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서 비너스를 다루지 않은 장르가 없을 정도로 그녀는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존재다. 하다못해 90년대 라디오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오던, 그리고 뜻도 모르면서 ‘암요 비너스. 암요 파야 (I’m your Venus. I’m your fire)’하며 따라 불렀던 팝송 제목도 Venus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은 미의 여신이 되기 위해 지금 이순간도 동네 짐(Gym)에서 열심히 피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 비친 비너스는 요즘 기준엔 비만 여성이다. 당시엔 그런 여인들이 숭배의 대상이었다. 고상한 말로 미의 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아름답고자 하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비너스의 푸근한 몸매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돼 보는 것도 멋진 일이 아닐까.
신금호
경기도 교육연수원 발전 전문위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www.mcultures.com
fire venus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