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바이올린

 

[아츠앤컬쳐] 매 순간 기록을 경신(更新)하며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 덕분에 현대사회는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물질과 정신의 확장을 이루는 놀라운 성과를 일궈내었다. 이제 현대인들은 디지털 매체를 사용하여 가상으로 사람을 사귀고, 결혼하고, 관계를 맺고, 아이를 기르며, 교육하고, 가족을 만날 뿐만 아니라 지식(知識)을 얻고 재화(財貨)를 생산하고 위로를 받으며 즐거움까지 얻는다. 심지어 디지털 기술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인 ‘몰카(몰래카메라)’는 인간을 단숨에 본능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위조차 순식간에 벗겨 버렸다. 디지털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가져온 그 기적과 같은 혜택만큼이나 인간의 품격을 더욱 저급하게 만드는 역작용을 가속화 시키는 데에도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창조자다.
또한 첨단기술의 얼리어답터(early adopter)로서 자신의 예술 작품에 최신의 기술을 가장 먼저 도입하여 접목시키는 선구자이다.

황규태(1938) 작가는 카메라가 기록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현실의 정확한 재현이 불가능한 ‘사진의 이중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사진의 지평을 개척한 디지털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원로사진가이다. 그는 충남 예산의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경향 신문사에 입사하며 본격적으로 사진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무궁화
무궁화

작가는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디지털(Digital)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디지털은 프레임(Frame) 안의 모든 사물을 오브제(objet)로 다루고 희화(戲畫)하여 놀이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발상(發想)과 표현(表現)을 위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어 주었다. 또한 디지털은 무거운 주제를 새털처럼 가볍게 표현하려는 그의 콘셉트(Concept)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8×10 대형카메라를 사용하여 모니터와 TV의 이미지를 고해상도로 확대 촬영하고, 대형 사이즈로 인화하여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미시(微視)의 세계를 거시(巨視)의 세계로 옮겨놓아 관객에게 초현실적인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의 작품은 디지털이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二進法)의 논리를 사용하여 비연속적, 단절적 신호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세계이지만 무엇을 통해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억지로 키운 픽셀의 거친 단면으로 나타날 수도, 아름답고 환상적인 미적 공간으로 재탄생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봄

작품 속에서 작가는 사진적이라거나 미술적인 것에 속하려 하지 않는다. 작가는 “나는 그저 내가 풀어내고 싶은 작품을 위해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도구인 카메라를 선택했을 뿐이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작품을 위한 도구이지 나의 작품은 컴퓨터 예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나는 기계에 대한 호기심은 전혀 없고 단지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작품에 필요하다면 그 어떠한 고정관념도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없고 스스로 그러한 고정 관념을 파괴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무용수처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저절로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처럼 마우스를 잡자마자 둔탁해 보였던 노장의 손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통해 디지털로 다듬어진 이미지들이 잠시 후 포토몽타주(Photomontage)의 과정을 거쳐,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플래그(Flag)’를 패러디(Parody)한 ‘기(Banner)’ 시리즈가 탄생되고, 무궁화 꽃이 피고 진다. 재스퍼 존스가 ‘성조기’를 ‘국가의 상징물’이 아닌 ‘제3의 오브제’로서 다루었던 것처럼 황규태 작가에 의해 패러디된 ‘태극기’는 더 이상 국가를 상징하는 경건함과 애국심의 대상이 아니며, 단지 기의(記意)가 분리된 기표(記標)로서, 하나의 오브제로 다루어질 뿐이다.

그의 사진에는 일반적으로 아티스트들이 지향하는 ‘성공’에 대한 ‘욕망’이 거세되어 있다. 그보다 작가는 팝아트(pop art) 작품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한 풍자와 새로운 작업에 불어넣을 신세대 감각의 유머로 디지털 공간에서 그가 만들어 갈 프레임 속 또 다른 세상을 유희(遊戲)하고픈 기대와 희열에 빠져있는 것이다. 제페토(Giuseppe Geppetto) 할아버지의 기도를 들은 작가가 포토샵으로 불어넣은 숨결로 인간이 된 피노키오를 바라본다. 피노키오는 어쩌면 굴곡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작가의 모습을 비춘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앞으로 하고자 하는 작품의 방향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넋두리처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언젠가 사진의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단 말이야! 단 한 장의 사진, 한 컷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 내는 그거 말이야! 그런데 그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그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로라토리오(Roaratorio)로부터 그의 숨어있던 사진적 자아를 떠올렸듯이 스스로의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예술의 범주를 더욱 확장시켜 프레임 안에 박제된 사진가가 아니라 진화를멈추지 않는 예술가로서 관객들과 교감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글 | 김이삭
전시기획자, Art Director, 이삭환경예술연구소 대표
kim.issac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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