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전에 봤던 영화인데도 다시 보면서 새롭게 몰입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미 봤던 영화인데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를 처음 보던 때의 느낌과 차이가 나서 내가 정말 이 영화를 본 것이 맞는지, 아닌지 의아할 정도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이 좋은 영화라 해도 나는 별로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심경에 변화의 요인은 당시 감상하는 내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 같다. 그저 영화에 나를 맡길 때 그런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아니 호르몬의 변화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장르도 마찬가지다. 그 동안 내 나름의 기준이 있어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고집스레 보지 않는 장르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액션 장르의 경우에는 주위 사람들이 좋다고 해야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최소 300만 명 이상은 들어야 슬슬 움직여 보게 되었다. 반면에 터무니없는 영화라도 좋아하는 장르면 대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은 좀 달랐다. 시사회 때부터 강력하게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류감독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절정의 맛을 아는 것 같다는 등, 빨리 가서 보라고 성화였다. 뭔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어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베테랑>은 광역수사대 에이스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투신 사건을 추적하던 중, 재벌 3세 조태호(유아인)의 범죄를 알아채고 체포하는 이야기이다. 주말 좌석 점유율이 70% 이상일 정도로 많은 관객이 몰렸다. 영화 보는 내내 대부분의 관객이 같은 타이밍에 웃거나 숨을 죽이며 함께 공감했다.
우선 이 영화는 이야기가 풍부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잘 짜여 있다. 각종 액션과 유머, 페이소스가 쫄깃쫄깃한 대사 속에 긴밀하게 녹아 있어 관객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다. 출연 배우들의 연기 조합도 보통 잘 맞는 게 아니었다. 영화는 쉬운 영화지만 쉽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폭력의 발생과 생산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폭력의 발생 현장은 상호 이익의 충돌로 생기지만,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폭력의 생산 현장은 힘의 균형이 기울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연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서형사가 함정수사를 하기 위해 여형사(장윤주)와연인 사이로 위장하고 중고차 매장으로 가서 벤츠 자동차를 구매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정도면 우리가 늘 보아 왔던 뻔한 구성의 범죄집단 이야기로 식상할 것 같았지만 <베테랑>은 달랐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위한 애피타이저로 이런 전개를 펼칠 정도라면 메인 스토리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나 이야기의 풍부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질 정도로 흘러넘쳤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딘가는 꼭 집어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대충 소재가 되었던 사건들이 떠올라 개연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재벌집 아들에 의해 일어난 폭력의 생산과 소비를 어떻게 ‘가오’ 떨어지는 방법으로 덮으려 하는지 생생하게 그리고 있었다. 외국이라면 쉽게 해결될 일들이 어쩜 그리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되는지, 과연 서형사가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시종 궁금한 영화였다.
다음은 조태호를 연기한 유아인에 대한 칭찬이 꼭 필요한 영화라 하겠다. <완득이>를 연기할 때보다 더 완숙해졌다고 할까? 우리 머릿속에서 바로 빠져나온 것 같은 재벌 아들 역을 싱크로율 100%로 연기해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 유아인의 연기가 조금이라도 기울었다면 황정민의 연기가 그처럼 차지게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빤질빤질하고 독선적이며 안하무인 격인 그 모습이 실감날수록 황정민의 연기가 과해도 넘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참 좋은 배우가 우리 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너무도 사랑스러운 배우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인 듯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끝으로 감독의 제작역량이 압권이었다. 이야기는 현장과 물량에서 완성된다. 이게 리얼리티인가? 관객이 그 정도면 됐는데 할 때마다 한 번 더 증폭되어 속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부산 컨테이너 항이라든가 명동에서의 카체이싱, 밤거리를 막고 펼치는 마지막 작전 등, 모든 것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감독의 치열한 제작 마인드가 느껴져서 속이 다 시원했다. 가끔 그렇다고 치고 하는 식으로 화면에 변명 가득한 펀드 공학적인 영화를 보게 될 때 밀려드는 한국영화에 대한 불안이 말끔히 사라졌다. 역시 감독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황정민의 말처럼 류승완이라는 이름의 ‘가오’가 떨어지지 않게 영화를 만들어 낸 것 같다.
극장을 나오며 실제로 어느 부당거래가 있는 곳에 이런 베테랑 형사가 있어 영화처럼 해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바람을 가졌다.
글 | 강인식
전 KBS, SBS PD, 전 싸이더스FNH 대표, 현 kt미디어 콘텐츠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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