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다양한 영화가 상영돼야 멀티플렉스이다. 같은 영화가 상영시간만 다를뿐 거의 과반에 가까운 스크린을 점령하는 건 문제이다. ‘명량’에 이어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도 스크린 독과점 이슈에서 자유롭지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영화를 개봉한 배급사들은 손해나 보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펀드 공학적으로 만든 체력이 약한 영화들은 개봉시기를 바꾸려고 했다. 혹시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의 취향이 자신들의 영화와 맞아떨어져 개싸라기 흥행(개봉 주보다 2주차에 더 많은 관객이 몰리는 현상을 일컫는 영화계 은어)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과감하게 개봉하는 영화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의욕이나 열정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수에 비례해서 나타났다.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이라는 ‘차이나타운’의 포스터처럼 말이다.

‘차이나타운’은 지하철의 보관함에 버려진 아이(김고은)가 ‘차이나타운’으로 팔려와 그곳의 보스인 ‘엄마’(김혜수)의 마음에 들고자 비정한 짓도 서슴없이 벌이면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차이나타운’을 보면서 몇 가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먼저 왜 지금 이런 소재의 영화가 나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영화 풍의 상업영화에 김혜수와 김고은과 같은 충무로의 가장 핫한 배우들이 출연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쓸모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식구가 되었다.’라는 말처럼 역설적인 내용의 주제였다.

먼저 시대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영화 속 ‘차이나타운’이 진짜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그런 인물들의 삶도 우리 주변에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화면은 약간의 셀로판지 느낌의 조명을 빼면 사실적인 묘사를 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반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말았다. 살인이나 장기적출 등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대형 범죄지만 출연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그런 행동으로 인한 결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걸 보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김혜수가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배우 김혜수의 연기를 좋아한다. 타짜에 나온 정 마담의 섹시한 원피스 뒤태와 적당히 비음이 섞인 목소리도 좋지만 늘 극 중 인물과 거리를 두는 그녀의 연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영화의 김혜수는 카리스마 빼고는 그동안 자신을 대변했던 모든 요소를 연기에서 지우고자 했다.

화장기 없이 검버섯이 핀 얼굴과 펑퍼짐한 몸배바지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조차 엄격하게 살아가는 그런 보스 역할을 하고 있다. 가끔 배우들은 자신이 목적으로 캐스팅되지 않고 존재 자체로써 필요할 때 과감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차이나타운’은 김고은을 비롯해 출연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그들의 연기에 당위성을 부여해 줄 내용이 부족하다 보니 모두 심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시종일관 부족한 서사에 비하여 배우들의 연기력이 영화 끝까지 어떻게 마무리될까 기대를 늦추지 않게 하였다. 주인공 김고은의 연기도 좋았지만 정신박약아로 나오는 조현철의 연기는 다음 작품에서 어떤 모습으로 관객과 만날 지 궁금증을 일으켰다.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니 외국에 나가면 ‘컬처 디스카운트’와 반대되는 이국적 분위기로 대우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 관객들이 한국은 저런가 하고 참작해서 영화를 봐준다면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나고 작품의 완성도도 있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차이나타운’이라는 제목이 외국인에게는 영화 내용이 사실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 같다.

만약 ‘차이나타운’이 영화계의 현실을 패러디한 것이라면 역설적인 주제가 잘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비천한 신분의 아이가 귀여움을 받으려 노력하다 결국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살모사처럼 자신을 키운 엄마를 비정하게 살해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영화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쓸모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모두와 투쟁을 하지만 그 모두는 서로 자신들을 식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스크린이 스크린을 잡아먹는 멀티플렉스 환경에서 이 영화는 좋은 패러디가 된다. 그래서 이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이 되는 그런 아이러니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에서 영화인들은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늙거나 쓸모가 없어지면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키울 수밖에 없는 게 영화판이라면, 한준희 감독이 죽인 ‘엄마’는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키우는 ‘일영’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글 | 강인식
전 KBS, SBS PD, 전 싸이더스FNH 대표, 현 kt미디어 콘텐츠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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