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summer’s Fantasia
[아츠앤컬쳐] 장건재 감독의 독립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보았다. 김새벽, 이와세료, 그리고 임형국이 출연한 독립영화이다. 첫 시작부터 감독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화면에 불친절하게 툭 던지고 관객과 이야기를 시작한다.
‘뭐에 관한 영화지? 여긴 어디지? 일본 같은데 출연하는 사람들이 일반인인가? 그럼 다큐멘터리 영화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일반인 부부의 인터뷰 화면이 시작된다. 앞에 무슨 질문이 있었을 텐데 그것은 생략된 체 대답을 하는 화면이다. ‘아, 뭔가 색다른 영화네.’ 이 영화를 추천해준 사람의 얼굴이 슬쩍 떠오른다. ‘뭐에 끌려 보라고 했지?’
잠시 보고 있노라면 일본 고조 시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현지 답사를 하는 한국감독 태훈(임형국)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백영화이다. 과거나 추억과 같이 어떤 의도가 있는 거 같은데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흑백영화라 정감도 있다. 그런데 화면의 사이즈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조금 답답한 듯하면서도 뭔가 절제된 듯한 프레임이 감독의 창작 의도를 나타내는 암호 같은데 바로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뭐지?’
속 시원히 줌 아웃으로 뽑을 수도 있을 텐데 시선이 머무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레임 밖으로 몰아내려는 듯한 구도가 계속 신경을 쓰게 하였다. ‘그래, 그건 끝까지 보면서 의도적인 것인지 알아보자.’ 극영화지만 화려함을 접고 다큐멘터리 영화로 자리매김을 하고자 하는 것일수도 있다. 잠시 판단을 밀어두기로 했다.
영화 만드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었을지라도 뭔가 영화다운 장치는 있을 것이다. 그게 뭔지 알아보자는 생각을 하는데 출연하는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자연스러우면서 매력이 있었다. ‘솔직해서인가? 모두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네.’ 일반인들인데도 모두 연기가 자연스러웠다. 영화 시작에 본 부제가 첫사랑이었는데 첫사랑 이야기는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 이르러 감독은 오래된 폐교에 영화적 장치를 슬쩍 집어넣었다. 오래 전 동경에서 회사에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안내인이 폐교에 걸린 사진 속 아이라는 설정이다.
여기서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 참 흥미로웠다. 출연자 세 사람. 태훈(임형국)과 통역사 미정(김새벽), 그리고 현지 안내인, 이렇게 셋이서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 아이가 현지 안내인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그게 바로 그 안내인의 사진 밖에 있는 첫사랑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관객의 궁금증이 점점 증폭되는데도 감독은 정작 벽에 걸린 사진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다른 영화처럼 감독이 친절히 컷을 나눠 관객에게 사진을 보여주기를 기대하지만 감독은 관객이 상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게 내버려둔다. ‘에이, 안 보여주나 보네.’하고 체념할 정도에 이르러서야 무심하게 지나치듯 살짝 보여준다. 감독이 보여주지 않으니 더욱 사실적이 되는 아이러니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 같았다.
2부는 컬러 영화이다. 한국에서 홀로 여행 온 혜정(김새벽)이 여행 안내소에서 길을 묻는데 현지에 사는 일본인 유스케(이와세료)가 말을 걸면서 시작된다. 유스케는 처음부터 프레임 안에 있지 않았다. 마치 감독의 의도 하에 만들어진 인위적인 만남이 아니라 프레임 밖에서 의도되지 않은 인연으로 만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처음 프레임 안에는 혜정과 안내인만 보인다. 유스케는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관객이 컷을 바꾸거나 카메라를 좌로 팬을 해서 보여주기를 바라지만 초지일관 그런 바람을 무시한 채 혜정과 유스케의 대화는 지속된다. ‘우리도 궁금하다고. 같이 좀 보자.’라고 생각해도 뚝심 있게 보여주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가 의도되지 않은 길 위의 만남이라는 것을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유스케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이제는 감독이 아니라 관객이 불러들인 셈이 되었다. ‘뭐지? 이것도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가?’ 앞의 1부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한 영화의 연장선인 듯 관객을 슬쩍 혼란스럽게 한다. 감독은 1부의 탄력으로 혹시 관객들이 다큐멘터리인 듯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테크닉일수도 있다. 이렇다면 모든 게 쉬워진다.
‘그런데 이들의 연기는 뭐지?’ 다큐멘터리라면 연기를 할 리 없는데 화려하진 않으면서도 자꾸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도록 만드는 힘이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한 씬이 롱 테이크가 되어 컷이 바뀌지 않다 보니 연기자의 내공이 부족하면 무너질 수 있는데, 마치 카페에서 맥주 마시며 나누는 대화 씬처럼 잘 버텨내고 있었다.
아직도 프레임은 시원하지 않다. 감독은 자연부락을 찍은 좋은 부감 샷까지도 프레임을 절제해서 찍는다. 그렇다면 1부나 2부 모두 형식까지도 절제라는 미덕을 프레임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런지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내용도 절제로 인해 가슴 한 켠이 아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1부, 2부에 공통으로 불꽃놀이가 나온다. 불꽃놀이는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허무하게 어둠에 묻힌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대나무 숲에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맑은 하늘을 바라본 느낌이 들었다.
영화란 반드시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사람은 이게 무슨 재미냐고 하면서 걷어찰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잠시 스마트폰을 놓고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건’이 아닌 사람과의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 | 강인식
전 KBS, SBS PD, 전 싸이더스FNH 대표, 현 kt미디어 콘텐츠담당 상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