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은 음악사에 기록된 하나의 전설이다. 두 사람은 클라라의 부친인 비크 선생의 불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결실을 맺었다. 슈만과 클라라는 1840년 라이프치히의 근교에 있는 쇤펠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은 조그만 마을 교회였다.
결혼과 함께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이 작곡되었다. 사랑이 듬뿍 담긴 이 가곡집을 듣고 클라라는 슈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당신처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과 흠모의 정은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알 수 없어요!”
클라라는 연애 시절에도 슈만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일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없이도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슈만은 16살에 갑자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살았다. 반면에 클라라는 어머니가 없이 홀아비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양쪽이 다 결손 가정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슈만과 클라라는 사회적인 위상이 많이 달랐다.
클라라는 슈만보다 9살 연하였지만, 슈만이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5살 무렵부터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엄격하게 피아노 교육을 받으며 신동으로서 유명세를 떨친 여성이었다. 9살에는 프로연주가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데뷔하였고, 그 후에도 유럽의 각지에서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명성을 날리던 연주자였다. 또한 그녀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이런 재원을 미래가 불투명한 젊은이 슈만에게 시집 보내자니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속이 뒤집혔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고 위상과 격이 떨어지는 사위를 얻는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비크 선생의 반대가 이렇게 크니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법정에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장인도 제자인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죄로 고발했다. 그리고 1840년에 슈만과 클라라는 법정 소송에서 승리하여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결혼 전에 벌어진 정말로 중요한 사건이 ‘슈만의 손가락 부상 사건’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불태우며 무리한 연습을 계속하던 슈만에게 예기치 못한 불운이 찾아왔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슈만의 손가락 부상 사건이다. 이때 부상당한 손가락은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고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가게 되었다.
사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은 사랑하는 두 독일 남녀의 결합이었지만 예술사의 차원에서 볼 때 이 결합은 너무도 뛰어난 작곡가와 연주자의 결합이 되었다. 시대의 작곡가와 연주자의 결합은 명작의 산실이 되어 낭만주의 음악사를 더욱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슈만의 수많은 가곡들이 클라라에 대한 사랑으로 만들어졌으며, 슈만에게 교향곡 작곡을 권유한 인물도 아내인 클라라였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교향곡의 제목은 ‘봄’이었다.
남편이 작곡한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클라라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랫동안 슈만의 화려한 피아노곡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그 곡을 연주할 일을 생각하면 나는 여왕처럼 행복하다!’
슈만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클라라는 40여 년 동안 연주회를 계속했다. 그리고 남편의 유작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를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남편의 작품들을 알리려는 그녀의 노력은 슈만을 음악사에 위대한 음악가로 위치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생전에 클라라는 남편과 함께 묻히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현재 슈만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글 | 이석렬
음악평론가,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전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평가위원, 전 대한민국 오늘의예술상 심사위원
https://www.facebook.com/sungny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