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피아노의 거성 프란츠 리스트는 전형적인 신동이었다. 그는 9살 때 첫 번째 공개연주회를 가졌고 10살 때부터는 직업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천재였다.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가 8살의 리스트가 연주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급기야 신동은 악성 베토벤이 자신의 이마에 키스를 하는 영광까지도 얻었다.
그렇지만 이런 리스트에게도 두 번의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만일 리스트가 이러한 시련들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의 피아노 예술은 최상의 경지로 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신동이란 기록만을 남긴 채 우리들의 관심과는 거리 먼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리스트에게 첫 번째 시련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16살이 되던 1827년에 갑자기 아버지가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리스트는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파리에서 살게 되었다. 열여섯 살의 리스트는 아버지가 남긴 모든 경제적 채무를 떠안고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또 한 번의 시련은 사랑의 상처였다. 리스트는 제자 중 한 여성인 카롤린느 드 생-클릭이란 소녀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는데, 상공장관이었던 그녀의 아버지가 두 사람의 결합을 심하게 반대하여 이 사랑은 결국 좌절되었다.
이러한 시련들은 건강상의 위기로 이어졌다. 실연의 상처에 휩싸인 리스트는 여러 달 동안 자리에만 누워 있었으며 사람들 앞에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파리의 신문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망 기사를 실었으며, 그의 죽음을 알리는 별도의 인쇄물들이 팔려나갔다.
실제로 리스트는 사흘 동안이나 의식이 없기도 했으며 실제로 죽은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당시의 사망 기사가 전적으로 오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실연의 후유증은 2년이나 계속되었고 피아노의 신동이던 인물이 피아노에 손을 대지도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련들은 그가 20살이 되면서부터 극복된다. 그를 새롭게 깨운 자극제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파가니니였다! 파가니니의 연주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교의 소유자,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초인적인 연주력을 얻었다고 소문난 파가니니가 나타난 것이다.
리스트가 파가니니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20살이 되던 1831년이었다. 당시 파가니니는 유럽의 연주계를 평정한 대가였고 괴담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파가니니에 대한 괴담으로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그가 목을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
자를 꼬아서 만든 줄이다!”
파가니니의 연주력은 20살의 리스트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제 피아노를 다시 연주하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극제를 만난 것이다. 20살의 리스트는 청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파가니니를 보면서 그 자신도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다. 파가니니는 리스트가 자신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기 위한 훌륭한 자극제가 된 것이다.
이제 리스트는 피아노의 비루투오소가 되려는 새로운 열망을 불태우게 되었다. 당시 리스트가 하루에 12시간을 연습했다는 설도 있다. 피아노의 신동은 이렇게 하여 피아노의 혜성이 되었다. 그는 젊은 날의 위기를 예술의 열정으로 극복했고 새로운 자극제를 만나 자신의 이상을 구현해간 인물이다.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는 피아노 예술의 찬연한 경지를 만나게 된다. 지금도 찬연한 피아노의 예술에는 리스트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다!
글 | 이석렬
음악평론가,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데 이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전 대한민국 오늘의예술상 심사위원
https://www.facebook.com/sungny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