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아츠앤컬쳐] 187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인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원장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강의실로 초대했다. 이유는 자신의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그의 형 안톤 루빈스타인과 함께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루빈스타인에게 자신이 작곡한 회심의 역작을 직접 시연하고자 한 차이코프스키의 기대는 컸다. 작곡가는 야심 찬 구상과 충만한 영감으로 만든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명피아니스트의 칭찬과 비평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이 곡은 피아노란 악기의 특성에 맞지 않으며, 독창성도 부족하다….’ 등의 심한 혹평을 늘어놓았다. 작곡가는 너무도 서운하여 강의실을 뛰쳐나와 별실로 들어가서 숨을 가라앉히고 있었는데, 루빈스타인은 거기까지 따라와서 이 협주곡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견해대로 음악을 수정하면 자신이 직접 초연해주겠다고 말했다.
차이코프스키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작품에 대해 확신으로 가득 찼던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스타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곡을 수정하지 않았다. 한 음도 못 고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곡가는 음악을 초연해줄 다른 인물을 찾았는데 그가 바로 독일의 명지휘자 한스 폰 뷜로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예술을 높이 평가한 한스 폰 뷜로에게 악보를 보내 초연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지휘자 뷜로는 이 곡이 독창적인 명곡이라고 확신했으며, 다음 해인 1875년 10월 25일에 미국의 보스턴에서 이 곡을 초연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미국의 청중들에게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초연은 이해 11월에 이루어졌는데 반응이 좋긴 하였지만 보스턴에서의 성공만큼은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시대의 명곡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은 애초에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지만, 결국은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된 것이다. 러시아 음악사의 이러한 기록은 명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명예에 하나의 오점을 남겼다. 지금도 이 음악에 대해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평판은 납득하기 어려운 문장으로 남았고 명피아니스트의 견해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다.
사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과 그의 형 안톤 루빈스타인은 러시아 음악의 연주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성장에도 많은 도움을 준인물들이었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음악 스타일을 너무나 존중하여 자신의 측근을 과소평가한 이날의 사건은 뼈아픈 후회를 남겼다.
후에 이날의 사건에 대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작곡가에게 사과를 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30대 나이의 젊은 작곡가에게 러시아의 대피아니스트가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로 등극해가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러시아 최고의 연주자가 결국 사과를 하게 된 이 사건은 러시아 작곡계의 쾌거였다.
이후 러시아의 음악계는 차이코프스키의 성공으로 사기가 오르고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러시아의 협주곡이 미국과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역사가 열린 것이다. 그 중심에 차이코프스키가 있었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후일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의 초대를 받아 카네기홀의 개관식에서도 이 곡을 직접 지휘했다.
1874년 12월 24일의 이 사건은 서구 유럽의 협주곡으로부터 많은 것을 흡수했지만 러시아의 협주곡은 스스로의 ‘My Way’를 갈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874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날은 러시아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날이다.
글 | 이석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집 자문위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심의위원,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책임심의관, 서울대학교 음악이론 학사, 석사,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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