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절단 기념사진,앞줄 왼쪽부터 김득련, 윤치호, 민영환, 러시아 무관 파스코프, 러시아 외무관리 플랑콘. 뒷줄 왼쪽부터 김도일,~
러시아 사절단 기념사진,앞줄 왼쪽부터 김득련, 윤치호, 민영환, 러시아 무관 파스코프, 러시아 외무관리 플랑콘. 뒷줄 왼쪽부터 김도일,~

[아츠앤컬쳐] 공식적인 기록상 한반도에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1948년 1월 16일, 조선오페라협회 주최, 시공관>다. 10회 공연이 매진되었다 하니 꽤 많은 사람이 한반도 최초 오페라를 감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소를 한반도로 한정하지 않았을 때 오페라라는 예술 자체를 처음 본 한국인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어떤 작품이었을까?

시간은 거슬러 조선 말기 격동의 시간으로 올라간다. 당시는 서양의 함선들이 엄청난 무기들을 앞세우고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여 아무리 저항해도 이겨낼 방법이 없었기에 1876년에 체결한 강화도조약 이후,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세에 대항해 생존 외교 전략을 펴느라 머리가 아픈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1884년 정치 쿠데타 사건인 갑신정변이 발생하지만 눈치 빠른 명성황후 민씨가 청나라군을 용인하여 정변을 무력화시킨다.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 왕실과 직접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지속적인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세자는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 망명하는 아관파천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이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공식 대관식이 1896년 5월 26일 크렘린궁의 성당에서 거행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세를 지고 있는 나라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다고 하니 고종은 사절단을 파견한다. 문제는 모스크바까지 어떻게 가느냐는 것.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없던 시절이라 처음엔 러시아 군함을 이용해 상하이로 간 후 인도양을 건너 유럽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상하이에 도착해 보니 배에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상감마마의 어명이니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어 차선책으로 다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가서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밴쿠버에 상륙한다. 기차로 대륙을 횡단해 뉴욕으로, 거기서 대서양을 건너 리버풀, 런던, 플리싱언, 베를린 그리고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는 다행히 전용 기차를 받아 마침내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감격해 다음날 21일 아침 임시공관 겸 호텔 숙소 발코니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지구 한 바퀴를 돈 세계 일주였다. 글자 그대로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위해 파견된 사절단은 민영환,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이었고 이들은 러시아 황실의 초청으로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보게 됐다. 그때 보았던 오페라가 국민악파의 원조 글린카가 작곡한 러시아어 최초의 오페라 <이반 수사닌(1836)>, 발레는 고대인도 배경의 <라 바야데르(1877)>였다. 당연히 러시아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황실은 러시아 토종 작품들을 선택했다. 윤치호와 김득련이 공연을 보았는데 사절단은 평생 처음 본 거대한 극장의 규모에 그리고 생동감 있고 현실적인 무대에 감탄했다.

당시 민영환의 개인비서 김득련이 공연 후기를 19세기 말 조선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영문으로 발행하던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 기고했는데 ‘사실적인 무대는 감동적이었지만 서양에서 군자가 되려면 저렇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구나. 상스럽다. 헐벗은 어린 여인들(발레리나들)은 까치발을 하고 학대를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라는 내용이었다. 워낙 점잖은 삶이 강조되던 조선의 풍토였고 발레를 하는 여인들의 복장에 눈을 둘 곳을 못 찾았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들은 정작 지구를 한 바퀴 돌아 겨우 찾아온 황제의 대관식에는 참석을 못 했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이유가 정말 황당하다. 대관식 참석자들은 교회 입장 시 남자의 경우 모자를 벗어야 했는데 팀 리더였던 민영익이 절대 불가라며 윤치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입장조차 하지 못한 코미디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냥 귀빈 대기실에 머물며 성당 밖에서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습만 멀뚱히 바라보았단다.

그렇게 본 목적은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채 1896년 10월 21일 러시아에서 돌아온 민영환, 김득련, 김도일은 돈의문에서 니콜라이 2세의 친서(러시아에 요구했던 300만 엔의 차관과 고종을 위한 경비 병력의 증원을 사실상 거절당한 내용)를 고종에게 전달했다.

국제적 감각을 갖고 있었던 윤치호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베를린을 거쳐 파리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 가르니에(Paris Opera house)에서 구노의 <파우스트(1859)>를 보았다고 한다. 마치 독일의 괴테가 즉흥적으로 이탈리아로 떠나 여러 예술인과 문화를 보고 배우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석 달을 파리에서 머물고는 1897년 1월 27일 제물포로 돌아왔다.

이후 조선에서의 아슬아슬했던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태평양 진출을 위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고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정책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일 것을 예감하고는, 여순항 공격을 필두로 1904년 2월 8일 먼저 전쟁을 시작해 결국 해전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한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지속적인 민중봉기와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 22일)’이 터지면서 계층 간 이념 갈등이 폭발했고, 일본을 부숴버리겠다고 러시아를 떠난 배들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아프리카를 돌아서 일본까지 가느라 전투를 치르기 전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였다. 일본의 계산에 운까지 더했다고 할까.

일본과 러시아는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짓는다. 일본은 승전국으로 배상금은 없었지만 그보다 엄청난 이득으로 조선과 남만주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면서 조선은 암흑의 일본 치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Russian_Imperial_Family_1913
Russian_Imperial_Family_1913

한편 러일전쟁에서의 패배한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계속되는 민중봉기와 국가재정의 악화로 인해 프랑스에 원조를 받기 위해 니콜라이 2세가 직접 파리에 찾아가지만 결국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총살을 당한 후 시신 은닉을 위해 불태워지는 잔혹한 결말을 맞는다.

당시에 니콜라이 2세의 프랑스 방문에 맞추어 디아길레프라는 러시아의 공연기획자가 동행하여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1874)>를 선보인 후 ‘발레 뤼스(Ballets Russes)’를 창단하고 역사에 남을 획기적 공연들을 제작해내며 클래식 공연 역사를 쓴다. 이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정치 상황에서 시작된 사건이 유럽과 전 세계의 예술계를 흔들어 놓은 진정한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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