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프라하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바쯜라프 광장. 멀리 광장 끝에는 웅장한 국립박물관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져있고, 그 앞에는 보헤미아 대공 성 바쯜라프(Václav 907~935)의 기마상이 세워져있다. 그는 기독교를 보헤미아에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체코민족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는 인물로 체코의 수호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한편 체코사람들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카를 4세(1336~1378), 체코식으로는 카렐 4세를 손꼽는다. 그는 프라하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대학을 세웠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카렐 대학이다. 또한 그는 프라하의 도시계획을 주도하면서 허허 벌판이던 이 지역을 신시가지로 만들었고 널따란 광장도 조성했다. 이곳에서는 정기적으로 말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오랫동안 ‘말 시장’으로 불렸다. 그런데 체코사람들은 17세기에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19세기에 들어 민족 정체성에 눈을 뜬 그들에게는 ‘말 시장’에 품위 있는 새 이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848년부터 이곳을 바쯜라프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이 광장은 1890년에서 1930년 사이에 국립미술관을 비롯, 호텔 에브로파와 같은 1900년대 초반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부터 번화가로 격상되었으며, 1912년에는 성 바쯜라프 기념상도 세워졌다. 이 기념상 기단에는 체코어로 ‘성 바츨라프여,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새겨진 문장이 눈길을 이끈다. 이 문장에는 이곳을 스쳐간 격동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왕조가 주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진 1918년 10월 28일, 바로 이 광장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합쳐져 단일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1993년에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화 되었다.
1968년 1월 5일 새로 선출된 둡체크 공산당 서기장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향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자 그해 8월 21일 소련 주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탱크가 프라하를 전격 침공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시민들이 항거했고, 1969년 1월 16일에는 당시 카렐 대학교 학생 얀 팔라흐가 이 광장에서 분신하여 3일 후에 카렐대학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저항의 상징이 되어 그의 장례식 때 대대적인 시위가 벌여졌다. 이어서 2월 25일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 얀 자이츠도 얀 팔라흐가 분신했던 곳에서 분신자살했다. 하지만 사태를 평정한 공산정권은 둡체크를 숙청하고,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탄압정치를 계속했다.
얀 팔라흐 죽음 20주년을 기념하는 1989년 1월-2월에 다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변화를 거부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열 달 후 역사의 흐름은 또 한 사람의 바쯜라프에 의해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가 바로 반체제 극작가 바쯜라프 하벨이다. 그해 11월 그가 구심점이 되어 수십만의 군중들이 이 광장에 모여 자유를 외쳤다. ‘벨벳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무혈혁명 앞에서 공산주의 시대는 맥없이 막을 내렸고, 바쯜라프 하벨은 자유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 둡브체크는 국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이 광장에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를 기념하여 청동십자가가 놓였다. 오늘날 체코 정부 지도자들은 어렵게 쟁취한 자유를 상기하며 이곳에 헌화한다. 이 십자가는 조용히 외치는 것 같다. ‘성 바쯜라프여,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