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 바로 옆에 붙은 작은 나라이다. 수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북동쪽으로 약 45킬로미터에 있는 유서 깊은 도시 트르나바(Trnava)를 거쳐 다시 북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더 올라가면 돌나 크루파(Dolná Krupá)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의 핵심은 브룬스빅(Brunsvik) 궁이다. 광대한 영국식 정원이 딸린 이 궁은 슬로바키아 전원에 세워진 고전풍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곳에서는 베토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궁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세기 초반 요제프 브룬스빅 백작에 의한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를 불러들여 기존의 바로크 양식의 건물을 1813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으로 개축했던 것이다. 이 궁 바로 옆의 작은 별채는 현재 베토벤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그 앞에는 높은음자리표를 테마로 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베토벤 시대의 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였다. 제국의 수도 빈에서 활동하던 베토벤은 1797년에서 1806년까지 여름이 되면 브룬스빅 백작의 초청으로 이곳에서 2~4주 정도 머물렀다. 브룬스빅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베토벤은 바로 이곳에서 피아노 소나타 14번 Op.27 No.2를 작곡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1802년 빈에서 4개의 피아노 소나타 Op.22, 26, 27 (no.1과 no.2), 28번을 출판했는데 Op. 22번과 28번은 전통적인 구성으로 되어있는 반면, 나머지 소나타들은 전통에서 벗어난 참신한 작품들이다. 그 중 1801년에 작곡한 작품 Op.27 No.2의 첫 악장은 피아노의 음향을 완전히 새롭게 생각하게 하는 이정표적인 작품이다. 베토벤은 이 소나타를 그가 연모하여 결혼까지도 생각했던 줄리에타 구이차르디에게 헌정했다. 베토벤 사후 베를린의 언론인이자 낭만시인이며 음악평론가이던 렐슈탑은 첫 악장이 ‘스위스 루체른 호수 위에 비치는 달빛을 받은 작은 배’를 연상한다고 해서 이 작품을 <월광 소나타>라고 불렀다.
그러면 줄리에타 구이차르디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베토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브룬스빅 가문의 테레제, 요제피네, 샤를로트 세 자매와, 그들의 외사촌인 줄리에타를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베토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가씨가 바로 17세의 줄리에타였던 것이다. 당시 베토벤은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네. 나도 그녀를 사랑한다네. 그녀와 결혼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라네.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여건이 되지가 않네.”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신분이 아주 달랐다는 뜻이다. 즉 당시 베토벤은 단순한 음악가 신분이었고 그녀는 귀족 신분이었다. 당시 이러한 신분 간의 격차는 아무리 위대한 베토벤도 뛰어넘지 못했다. 사실 베토벤이 요제프 브룬스빅 백작의 초대를 받아 돌나 크루파에 왔을 때, 화려한 브룬스빅 궁 안에서 귀빈으로서 융성한 대접을 받았을 것 같지만, 말이 ‘초대’이지 그가 기거했던 곳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공간이었다. 현재 베토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작은 별채는 당시 정원지기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베토벤은 바로 이 집 다락방에서 기거했던 것이다.
한편 줄리에타는 사촌 언니 테레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갈렌베르크 공과 약혼을 파기하고 못생긴 베토벤과 결혼하고 싶어. 그는 정말 마음에 들거든. 단, 그와 함께 있음으로써 나의 신분이 낮아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야.”라고 썼다. 결국 그녀는 미남 귀족 갈렌베르크와 결혼하여 멀리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이주했다. 그러니까 젊은 베토벤이 마음속에 품었던 사랑의 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월광 소나타>는 불멸의 명곡이 되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베토벤 순례자들을 슬로바키아의 외진 마을 돌나 크루파로 끌어들이고 있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