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청계산은 서울 근교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휴식 겸 산책에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고려 충신 이색의 시에 의하면 청룡산(靑龍山)이라 불렸는데, 조선에 와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에 청계산(淸溪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룡산은 산정에서 청룡이 승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청룡산 아래에는 오래된 절집이 있고
빙설이 쌓인 벼랑이 들과 계곡에 임했네
남쪽 창에 단정히 앉아서 주역을 읽는데,
종소리 한번 울리니 닭이 홰에 오르려 하는구나.(=저녁이 되었구나) - 이색(李穡)
청계산 남쪽 중턱에 자리한 청계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불분명하나, 남북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10년(1284년)에 시중 조인규(趙仁規)가 막대한 사재로 중창하고 그의 사당을 짓고 원찰로 삼았다. 그는 평양 출신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몽골어 통역관이 되어 충렬왕과 가까이 지내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장군이 되고, 대장군에 이어 승지가 되었다. 원나라의 관직도 받아 지위가 더욱 높아졌다. 훗날 충선왕의 장인이 되었고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아들을 넷 두었는데,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가문을 번성하게 했다. 친원으로 권문세족이 된 그가 독실한 불교신자로 청계사를 창건하다시피 한 기록이 사찰 내 조정숙공사당기(趙貞肅公祠堂記碑)에 남아 있다. 조인규의 처세와 친원 외교와 정치활동은 그를 최고의 지위에 오르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며 고려 말에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 태종 때인 1407년에 천태종에 소속시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관에 소속되었다. 1761년(영조37)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이 절에 원당을 설치한 뒤 밤나무 3,000주를 심었고, 1789년(정조13)에는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정된 바 있다. 조선에 들어 두 차례 크게 화재가 났으나 중건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종교 탄압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오다가 1955년 비구니 아연이 중창을 시작한 이래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의 우리에게는 우담바라가 핀 사찰로 유명하다. 2000년 10월에 관세음보살 왼쪽 눈썹 옆에 삼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 20여 개가 피어 전국에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우담바라꽃이 아니고 풀잠자리알이라고 하는 주장이 대두되어 진위 논란이 일자 종단에서 뽑아 아궁이에 던져버리라고 했다.
그러자 당시 부주지 성행스님이 말하기를, “우담바라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꽃이 피고 나서 절이 정화되어 청계사는 그 전과는 다른 사찰이 되었다. 그 꽃을 처음 발견한 보살님 마음 속에 피어 있음이 분명하니, 그해에 나라에 경사가 많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겨울에는 눈도 많이 내렸는데, 대법회 마지막날 쌓은 눈에 해가 비쳤을 때 온 세상이 금빛이었다. 분명 장엄이었다. 우리 마음속에 꽃이 핀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청계사에는 사천왕문이 없고 사찰 입구 계단에 사천왕이 나와 서 있고, 계단을 올라 만세루를 지나면 석가모니의 일생이 담긴 팔상성도와 천인공양상을 조각한 축대 위에 극락보전이 있고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을 모셨다.
청계사에서 인상적인 명물 중 하나로 1999년 지명스님이 봉안한 길이 11미터에 달하는 와불상이 있다. 작은 돌을 모아 만든 특이한 와불로 많은 시민들이 찾아 기도를 드린다.
청계사에는 조선 숙종 때인 1701년에 사인 스님이 만든 동종이 있다. 사인 스님은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더하여 이 종을 만들었는데, 종의 허리에는 조선 초기부터 보이는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듯한 두 줄의 횡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제작자와 시기가 적힌 명문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조선 후기 대표작인 이 범종은 잠시 봉은사로 옮겨졌다가 다시 청계사로 옮겨졌다.
이외에, 불탱화로 헌종 10년(1844년) 극락보전의 신중도(神衆圖)는 19세기 경기 불화의 중요한 자료이며, 불교 문헌과 천자문 등 목판 총 14종 466판이 있고, 부도와 비석 조정숙공사당기비, 청계사 사적기비(淸溪寺事蹟記碑) 등이 있다.
글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