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침묵, 생명의 울림

이동재, seed 한지에 오배자 채색 32 x 41cm 2025
이동재, seed 한지에 오배자 채색 32 x 41cm 2025

 

[아츠앤컬쳐] 우리는 너무 많은 이미지 속에 살고 있다. 화면을 넘기고, 스크롤을 내리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받는 일상이 이어진다. 그런 시대에 누군가는 말없이 콩 한 알, 종이 한 장, 풀색 물감 한 방울을 다루는 데 온 마음을 쏟는다. 이동재는 그런 예술가다. 그의 작업은 늘 조용하고, 천천히 다가오며, 묘하게도 오래 머문다. 그 감흥에 취해 되돌아볼 수 있는 삶의 여백을 선물 받는다.

이동재, skin 한지에 오배자 채색 53 x 65cm 2025
이동재, skin 한지에 오배자 채색 53 x 65cm 2025

714일부터 930일까지 대구 갤러리미르에서 열리는 이동재 초대전 <유기적 회화>는 그의 지난 작업 흐름 속 변화지속의 결을 동시에 보여주는 자리다. 콩이나 쌀처럼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자연물을 노동집약적으로 화면에 펼치며 시대의 인물을 형상화했던 초기작에서, 한지와 오배자를 활용한 물질 탐구의 회화로 전이한 최근의 신작까지 아우른다. 이동재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반복적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일궈왔다. 그의 새로움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창의적 발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동재, icon_acrylic, bean on canvas_53X45.5cm_2009
이동재, icon_acrylic, bean on canvas_53X45.5cm_2009

가령 2009년 작품 <미스터 빈>은 그런 출발점의 하나다. 완전히 건조 후 보존 처리한 콩을 하나하나 붙여 구성된 이 작품은 단순한 언어적 유희나 풍자가 아니다. 농산물이라는 유기적 물질이 대중 아이콘이라는 인위적 형상과 충돌하면서 묘한 긴장감을 자극한다. 미세한 울퉁불퉁함 속에 반복된 손맛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물리적인 감각 자체가 화면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그의 작업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물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라는 화두를 건넨다.

이동재, skin 한지에 오배자 채색 90 x 90cm 2025
이동재, skin 한지에 오배자 채색 90 x 90cm 2025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이동재의 화면은 훨씬 더 비어 있고, 더 촉각적이며, 더 느리게 숨을 쉰다. 최근작 <seed><skin>은 한지에 오배자를 수십 번 덧칠해 얻은 깊은 색감과 감각의 밀도를 담고 있다. 표면은 마치 생명체의 피부를 연상시키거나, 어떤 원시 행성의 지질을 떠올리게 한다. 화면의 반복된 패턴은 작가적 의지의 경계를 넘나든 흔적이며, 자연에 의해 스스로 생성된 것 같은 우연성을 겸비했다. 이는 완성이란 의도하는 행위 너머의 우연까지 품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이동재식 수행적 회화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동재, skin 한지에 오배자 채색 73 x 91cm 2025
이동재, skin 한지에 오배자 채색 73 x 91cm 2025

그렇다고 이동재의 회화는 어떤 주장을 하거나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지 않는다. 대신, 재료와 시간, 손의 행위, 그리고 물질성과 생명성 사이에 놓인 침묵의 긴장감을 응시하는 장을 선사한다. 일상에서 스치듯 밀려났던 질문의 원형들, ‘우리의 감각에 대한 신뢰감예술을 천천히 향유할 지혜를 품고 있다.

이동재, icon_David Bowie, icon_Yuna Kim, crystal on stainless steel, 100X48cm, 2023
이동재, icon_David Bowie, icon_Yuna Kim, crystal on stainless steel, 100X48cm, 2023

이번 이동재의 개인전 <유기적 회화>는 작업 세계 전반을 조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회화라는 형식으로 물질에 작가적 해석이 가미될 때, 어떻게 감각적 사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장이다. 결국 그의 작업은 회화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림이 그려지기 이전의 감각, 그리고 그것이 다시 표면 위로 되살아나는 순간을 포착한 새로운 풍경의 연출이다. “당신에게 물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이동재의 조용한 질문을 통해, 우리 내면에 잠들었던 감각들도 하나둘 깨어나게 된다.

 

이동재(1974~) 작가는 동국대 미술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내외에서 14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2000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인간의 숲, 회화의 숲기획전을 시작으로 100여 회 이상의 주요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동안 참여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프랑스 파리국제예술공동체(2008), 경기도 양주 장흥아뜰리에(2006~2009, 2015~2020) 등을 거쳐 2021년부터 현재까진 남양주 갤러리퍼플 스튜디오에서 작품활동 중이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환기미술관, OCI미술관, 진천종박물관 외 다수에 소장되어 있다.

 

글 ㅣ 김윤섭

예술나눔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 이사장, 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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