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아츠앤컬쳐]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에게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고마운 인물이었다. 차이코프스키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을 받은 데에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두 인물의 견해는 항시 의견일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예술에 대해 서로를 존중하며 중요한 의견을 나누곤 했지만 때로는 강한 이견을 보여 두 인물 간의 관계가 부드럽지 않게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었다. 더구나 두 인물은 전공이 달라 한 사람은 작곡가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하루는 작곡가가 피아니스트를 강의실로 초대했다.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협주곡을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30대의 젊은 작곡가는 자신의 첫 번째 협주곡을 피아노로 연주했고 이 음악은 러시아 유명 피아니스트의 귀를 자극했다. 작곡가는 조언을 구한다고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칭찬도 기대했을 것이다. 러시아의 천재 작곡가는 회심의 협주곡을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들려주었고 강의실의 분위기는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시연을 들은 루빈스타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기대에는 완전히 벗어나서 다음과 같은 비판이 나왔던 것이다.

“이 곡은 피아노의 특성에 맞지 않으며… 독창성도 부족하다!”

이러한 평가는 작곡가에게 커다란 실망으로 다가왔다. 결코 이러한 평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중요한 지인에게 이런 평가를 받았기에 작곡가는 강의실을 나와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별실로 들어가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런 차이코프스키에게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견해대로 음악을 수정하면 직접 초연해주겠다고 말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루빈스타인의 조언을 고려하지 않고 음악을 전혀 고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루빈스타인은 이 곡의 초연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으며 작곡가는 이 곡을 초연해줄 다른 인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이 곡의 악보를 독일에까지 보낸 것을 보면 작곡가가 이 곡에 건 기대는 참으로 컸던 것 같다.

결국 작곡가는 이 음악을 초연해줄 지휘자를 찾았으며 이 명곡은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의해 초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휘자 뷜로는 이 곡을 높이 평가했으며 1875년 10월 25일에 초연하여 청중들에게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의 초연은 그해 11월에 이루어졌다.

후에 그때의 사건에 대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작곡가에게 사과를 했다고 한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러시아 음악의 역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이 곡에 대한 평가와 신념에서는 차이코프스키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자신의 측근이 만든 협주곡을 과소평가한 이 사건은 루빈스타인에게도 후회를 남겼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곡을 통해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협주곡의 역사에서 화려한 금자탑을 쌓아올리게 된다. 러시아 피아노협주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레퍼토리가 이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참신하면서도 독창적인 러시아의 협주곡이 세계인의 가슴에 파고든 역사적인 시간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 협주곡은 러시아는 물론 다른 국가들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작곡가는 후일 다른 나라들에서 이 곡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 협주곡은 조국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극장들에서 울려 퍼지는 명곡이 되었다. 이 협주곡은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음악의 열정을 지킨 작곡가에게 신이 내린 선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지구촌의 어느 극장에서는 이 명곡이 연주되고 있을 것이다!

글 | 이석렬
2017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7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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