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말러의 작품 ‘대지의 노래’는 교향곡이다. 그렇지만 가사들이 있고 두 명의 성악가가 등장하는 성악곡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두 명의 성악가는 한 악장씩을 교대로 노래하면서 깊은 인상을 던져준다. 이처럼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이 함께 하는 걸작의 탄생에 대해 지금도 세계의 예술인들이 감탄한다. 그렇지만 말러 자신은 이 작품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는 많은 음악가들의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대지의 노래’에는 동양적인 인상들이 강하게 배어있다. 노래의 가사로는 중국의 여러 시들이 쓰였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중국의 시들은 염세적이고 허무에 찬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작곡가 자신이 이러한 시들을 갑자기 수용했으므로 작품의 탄생에 대해 많은 추측과 의문을 낳기도 했다.

말러의 부인인 알마 쉰들러에 따르면 말러는 9번 교향곡이라는 제목에 대해 일종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베토벤부터 드보르자크까지 교향곡의 대가들이 9개의 교향곡 이상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홉 번째 교향곡은 자신에게도 마지막 교향곡이 된다는 불안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말러가 9번 교향곡이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에 대한 알마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지의 노래’를 작곡할 당시에 말러의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았다.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었던 말러는 극장과의 불화 때문에 감독직에서 사임을 하였으며, 사랑하는 딸 마리아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런 시기에 한스 베트게라는 인물이 중국의 시 83수를 번안하여 ‘중국의 피리’라는 시집을 내놓았다. 말러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 여러 개를 선택해서 작품의 가사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피아노 반주 버전을 만들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교향곡으로 완성했다. 이것이 한 시간 이상 연주되는 대작 ‘대지의 노래’이다.

말러가 이 작품의 작곡을 시작한 것이 1907년이라는 설이 있고 1908년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의 피리’가 출판된 정확한 시점이 불분명한 탓에 ‘대지의 노래’의 작곡 시점도 달라지곤 한다. 작곡의 시작이 1907년이든 1908년이든 ‘대지의 노래’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1910년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대지의 노래’는 작곡가의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다.

초연은 말러가 사망하고 몇 달 뒤인 1911년 11월에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말러를 사랑했던 여러 음악가들이 슬픔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말러는 생전에 ‘대지의 노래’를 초연할 수 없었고 작품을 듣지도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말러는 1911년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해 7월에 멩겔베르크가 이 곡을 초연하려 했지만 결국 초연을 하게 된 지휘자는 브루노 발터였다.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말러를 아끼던 여러 음악가들이 뮌헨으로 달려와 이 작품과 함께했다. 브루노 발터가 지휘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말러의 이 작품은 염세적이고 허무한 분위기들을 담고 있다. 시간을 초월하는 듯한 분위기가 작품 속에 가득히 투영된다.

마지막 악장에서는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과 왕유의 시들이 등장한다. 첼로가 낮게 깔리는 가운데 ‘해는 서산으로 지고’로 시작되는 맹호연의 시를 알토가 노래한다. 알토의 노래는 공허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 편의 동양화처럼 다가온다. 이 악장의 후반부에는 왕유의 시가 등장하는데 여러 악기들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간다네, 산속을 방황한다네’로 시작되는 노래 소리가 등장한다. 마지막에서는 청초한 울림이 지속되고 가수가 ‘영원히’라는 가사를 노래하면서 작품의 막이 내린다. 마지막 가사처럼 말러는 영원히 잠든 후에 ‘대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글 | 이석렬
2017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7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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