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베토벤의 교향곡 9곡은 불멸의 교향곡 시리즈라고 불린다. 베토벤 자신이 일생을 바쳐 이룩한 9개의 교향곡은 서양 음악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첫 번째 곡은 그다지 이르지도 않고 늦은 나이도 아닌 30살의 나이에 세상에 발표되었다. 아마도 곡의 구상은 20대 중반부터 시작된 듯하다. 이 교향곡에 대해 음악 평론가 조지 그로브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베토벤이 교향곡을 이 곡 하나만 남기고 죽었다면 (이 교향곡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작품은 더 많이 음미 되고, 더 많이 평가받고, 더 많이 사랑받았을 것이다.”
조지 그로브의 이 말은 베토벤의 첫 번째 교향곡이 갖는 독자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베토벤의 첫 번째 교향곡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계보를 잇는 야심 찬 선언이기도 했지만 교향곡의 역사에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빼어난 걸작이기도 했다.
이 교향곡은 1800년 4월 2일에 빈의 부르크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당시 ‘Allegemeine musicalische Zeitung’ 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들이 이 작품에 대해 호평을 내보냈는데 특히나 베토벤적인 대담한 진행과 인상들에 대해 호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베토벤의 첫 번째 교향곡은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었다. 당시의 매체들과 평론가들은 특히나 베토벤의 실험적 작풍에 대해 주목했다. 베토벤은 이 작품의 3악장을 전통대로 미뉴에트라고 부르긴 했으나, 정작 이 악장의 흐름을 미뉴에트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양상을 드러냈다. 한마디를 한 박으로 지휘해야 할 정도로 빠른 진행을 미뉴에트라고 보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미뉴에트와 함께 하는 트리오 부분은 위트에 넘쳤다.
여러 매체들이 이 교향곡의 대담한 진행과 참신한 면모들에 대해 호평을 쏟아냈지만, 이 곡의 새로운 면모를 잘 파악하지 못한 문장들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목관이 남용되었고 목관의 음향 층이 너무 두텁다.”라는 지적은 베토벤의 시도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시대를 앞서간 베토벤의 의도가 모두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작곡가 베토벤은 이 역사적인 교향곡을 누구에게 헌정하였을까? 작곡가는 이 교향곡을 자신의 후원자였던 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에게 헌정하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이 교향곡이 출판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곡은 베토벤의 또 다른 후원자였던 스비텐 남작에게 헌정되었다고 한다. 스비텐 남작 역시 빈에서의 베토벤 활동을 도운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날의 초연 공연에서는 베토벤 자신이 C장조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였고 이 교향곡도 지휘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어떤 언론은 “베토벤이 부르크테아터를 혼자 지배하고 있었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베토벤의 천재성과 새로운 교향곡의 탄생이 교향곡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순간이었다.
모차르트는 8살의 나이에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하였고 멘델스존은 16살의 나이에 현악 8중주를 작곡하여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그의 나이 30살에 이르러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다. 후세의 학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베토벤의 음악이 새로운 얼굴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고향 본을 떠나 음악의 수도 빈에 정착한 지 8년 만에 역사적인 교향곡의 탄생을 본 것이다. 이때부터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음악의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하게 된다. 이날의 공연은 베토벤의 교향곡이 음악의 역사에 문을 두드리는 순간이었다!
글 | 이석렬
2017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7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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