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출품된 일본의 도자기와 목판화는 당대 서양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일본풍 화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오늘날 ‘자포니즘(Japonism)’이라 일컫는 일본문화모방을 유행시키는 주역이 됐다. 서양을 대표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일본 목판화를 수집하고 더나아가 직접 모사한 작품까지 남겼다는 사실은 자포니즘의 영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화가들을 사로잡은 시각적 충격에 비해 동양음악은 큰 파장을 남기지 못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음악 외적인 면에서 대작 오페라들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은 순종적인 동양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호기심을 자극하는 오페라였다.

지금까지 공연되고 있는 작품들 중에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중국의 자금성을 배경으로 망명한 왕자와 냉혈한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푸치니의 <투란도트>, 일본에 잠시 주둔한 미국 해군 장교와 부모를 잃고 게이샤가 된 초초상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나비부인>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에서는 비엔나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커플이 남자의 고향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겪는 문화충격도 묘사한다. 사랑하는 남자만 믿고 낯선 나라에 왔지만 후사를 위해 여러 부인을 맞아야 한다는 중국 왕실의 전통으로 인한 갈등은 결국 해소되지 못한다.

실론티의 고장 실론섬을 배경으로 하는 비제의 <진주조개잡이>는 아름다운 여인 앞에 무너지는 남자들의 우정을 그리고 있는데, 질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고 목숨까지 빼앗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위의 작품들 가운데 그야말로 세계적 유명세를 가진 작품은 푸치니의 작품들이다. 특히 <나비부인>의 주인공 초초상은 잠시 제비처럼 왔다가 가버린 나쁜 미국 남자만 기다리며, 자신을 짝사랑하던 일본 왕자의 청혼까지 거절한다. 그녀는 어떤 맑은 날 그이가 돌아올 거라며 오히려 현명한 하녀 스즈키를 꾸짖기까지 한다.

 3년의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항구에 다시 돌아온 핑커톤의 배를 발견한 나비부인은 하녀 스즈키와 꽃의 이중창을 부르며 기뻐한다. 그러나 핑커톤 장교는 3년 만에 돌아와서 부인에게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만 데리고 떠나려 한다. 사실 그는 미국에서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까지 동행한 것이었다. 진실을 마주한 나비부인은 수 많은 하지 못한 말들을 가슴에 묻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당시 수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설에 대해 푸치니는 요샛말로 “차려 놓은 밥상을 물릴 수가 없었네!”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요즘 같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말이 아닌가? 이렇게 공공연히 염문설까지 대외적으로 말하고 다니는 푸치니는 아내의 질투심으로 고생을 그렇게 했어도 밖에 나가서는 오페라라는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나비부인을 가장사랑하는 캐릭터라 이야기하고 다녔단다. 머리 복잡하지 않게 알아서 사라져주는 여인들이 좋다는 말처럼 들리는 건 나만의 환청일까?

이런 푸치니의 <나비부인>보다 20년가량 앞서 외국인 남자에게 버림받는 여인을 소재로 한 오페라가 있는데 배경은 바로 인도이다. 프랑스 Léo Delibes의 오페라 <Lakeme>(14 April 1883 Opéra-Comique, 파리 초연). 힌두교 사제의 딸인 라크메(재물과 행운의 여신 Lakshimi에서 파생된 이름)는 그녀의 하녀 말리카와 연꽃을 따러 강가로 간다. 이때 부르는 꽃의 이중창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드라마나 영화, CF를 통해 들어보았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유명하다.

강으로 들어가기 전 라크메는 착용하고 있던 보석들을 강가에 두고 오는데 지나가던 영국 사람들이 주인 잃은 보석의 아름다움에 취한다. 그 중에 인도로 발령받은 군인 장교 제라드는 인기척을 느끼고 숨어있다 강에서 나온 라크메를 보고 다가간다. 라크메는 놀라서 주위에 도움을 청했지만 금세 제라드에게 호기심을 느껴 도움을 주려고 찾아온 이들을 돌려보낸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는 힌두교 종교 지도자의 집안에서 외간남자 그것도 외국인 남자와의 접촉은 불명예로 여겨진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능욕한 제라드를 찾으려 딸을 시장에 데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한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 아리아 ‘종의 노래 (Bell song)’이다.) 지나가던 제라드는 군중 사이를 비집고 라크메를 보기 위해 앞으로 나오면서 정체를 들키고 만다.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 라크메는 기절하는 척하지만 결국 제라드는 아버지의 칼에 찔리고 만다.

부상당한 제라드를 부축해 숲으로 들어간 라크메는 제라드가 건강을 회복하도록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다.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의미로 라크메가 성스러운 물을 뜨기 위해 나간 사이, 제라드의 친구 프레데릭이 찾아와 그에게 본연의 의무를 환기시키고 결국 제라드는 라크메의 결혼 제안을 거절하고 떠난다. 혼자 남은 라크메는 불명예스러운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하여, 독이 있는 다투라 잎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오페라의 막이 내린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그녀의 목숨을 끊은 칼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고 불명예스러운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나비부인>은 <라크메>의 리부트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외국인 남자와의 사랑, 시련, 죽음, 그리고 꽃의 이중창. 내용은 비극적이고 음악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비극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세계, 그 답은 바로 오페라다.

19세기 서양에 처음 전해진 동양 여인의 이미지는 순종적이며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헌신적인 존재였다. 신비로운 동양 여인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유용하게 보고 듣는 문화 콘텐츠가 탄생된 것이니 나름 긍정적인 부작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신금호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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