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을 두드리는 샹송
[아츠앤컬쳐] 스산한 바람과 함께 한잔의 커피가 그리워지는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바로 ‘Autumn Leaves, 고엽’이다. 잔잔한 재즈 선율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이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쓸쓸한 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Autumn Leaves’의 원곡이 샹송 ‘Les Feuilles mortes’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때론 연주자들 조차도 재즈 스탠더드 넘버 이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Yves Montand)의 목소리로 프랑스적 감수성을 전 세계에 퍼뜨린 ‘Les Feuilles mortes’는 1945년 초현실주의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와 헝가리계 프랑스 작곡가 조셉 코스마(Joseph Kosma)의 작품이다.
이 곡은 이듬해인 46년 시적 사실주의(Poetic realism)를 대표하는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é) 감독의 영화 ‘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에 삽입되는데, 영화는 4년 만에 미국 극장가에 진출하여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파리(Paris)에서 벌어지는 레지스탕스와 친독파 간의 상충된 정서를 비극적 사랑 안에 담아낸 영화의 성공엔 프레베르의 치밀한 시나리오와 코스마의 애수에 젖은 음악, 그리고 이브 몽땅의 수려한 외모가 크게 기여한다. 당시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후광에 의지하던 신인 이브 몽땅은 요샛말로 발연기의 오명에도 불구하고 ‘고엽’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난다.
“북풍이 낙엽들을 실어 나르네요. 싸늘한 망각의 밤에. 난 잊지 않았어요. 내게 들려주던 그 노래를… 그대는 나를 사랑했고, 난 그대를 사랑했죠. 우리 둘은 함께 했지만… 결국 삶은 사랑하는 연인들을 슬그머니 갈라놓아요.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에 새겨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리죠…”
시적 심상과 선율적 애상이 하나로 어우러진 ‘고엽’의 아름다움은 사실 프레베르와 코스마의 오랜 협업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두 사람의 콜라보는 프레베르의 첫 시집 ‘말(Paroles)’을 개시로 약 80여 편에 달하는데, 그 중 ‘고엽’은 최고의 걸작으로 샹송의 세계시장 입성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사랑과 인생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고엽의 섬세한 독백과 애잔한 멜로디는 피아프, 쥘리에뜨 그레꼬(Juliette Greco), 레오 마르쟌느(Leo Marjane), 프랑소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등 당대 최고의 여가수들의 목소리를 통해 더 없이 아름답게 채색되며, 세련미를더한 ‘샹송 리테레르(Chanson littéraire: 문학적 샹송)’의 변모를 목도하게 한다.
프랑스 ‘샹송(Chanson)’은 중세로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매우 오랜 역사와 다양성을 자랑한다. 중세 시대 귀족 문화를 주도하던 ‘트루베르(Trouvère)’나 ‘트루바두르(Troubadour)’ 즉, 음유시인들의 창작으로 전파된 노래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거리의 악사 겸 가수인 ‘미니스트렐(Ministrel)’의 풍자와 해학을 더해 시민들에게 보급된다. 이후 프랑스 혁명을 지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근대 샹송의 발전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카바레(Cabaret)나 카페 콩세르(Café concert)를 통한 대중적 향유와 대규모 뮤직 홀의 확산에 힘 입은 바 크다.
대전 후의 샹송은 팝이나 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프랑스어 고유의 음률과 미학을 살리며, 선율보다는 시적 정서를 중요시하는 작품성을 토대로 독자적 발전을 거듭한다. 특히 ‘칸초네(Canzone)’나 ‘칸시온(Canción)’ 등 타 유럽 국가들의 노래와의 변별성을 갖추게 되며, 가사와 주제에 따른 분류를 통해 ‘사랑, 부조리, 환상, 문학’으로 대변되는 ‘샤름(charme), 레알리스트(réaliste), 팡테지스트(fantaisiste), 리테레르(littéraire)’ 등 다양한 장르적 구분이 이루어진다.
최고의 문학적 샹송으로 손꼽히는 ‘고엽’은 ‘리테레르(littéraire)’에 속하는 것으로, 프랑스 음악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 마치 잘 숙성된 와인에 비할 풍미를 간직하고 있다.프랑스인들의 예술적 감성과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고엽’은 이후 대서양을 넘어 1950년대 미국시장에 진출하는데, 이는 유명 싱어송라이터 조니 머서(Johnny Mercer)의 영어 번역판을 통해서이다.
무엇보다 ‘Autumn Leaves’로 개사(改詞)된 빙 크로스비(Bing Crosby) 버전의 폭발적 인기는 55년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의 백만 장 앨범 판매기록과 더불어 56년 동명영화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냇 킹 콜(Nat King Cole)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스크린을 온통 가을의 발라드로 물들인 ‘고엽’은 추후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 에바 케시디(Eva Cassidy), 밥 딜런(Bob Dylan), 바브라 스트라이젠드(Barbra Streisand), 에릭 클립튼(Eric Clapton), 다이아나 크롤(Diana Krall) 등 대중 음악씬을 대표하는 가수들과 만나며 600여개의 버전으로 재탄생된다.
놀라운 것은 이렇듯 많은 버전들 속에서도 수많은 빛을 머금은 크리스탈과 같이 반짝이는 원곡의 투명성이다. 이 가을 문득 높아진 하늘과 작은 새 소리, 흔들리는 꽃과 빛바랜 잎새들에 마음을 싣게 되는 날엔 나지막한 독백의 ‘Les Feuilles mortes’를 들으며 프레베르의 낡은 시집을 꺼내 드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되리라 본다. 소박하고 유쾌하며 친근하고도 이상한 프레베르가 당신에게 꼭 어울리는 시를 읊어 줄지 누가 알겠는가!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예술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