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로
볼레로

[아츠앤컬쳐] 1928년 11월 22일 밤, 파리 국립오페라극장에서는 새로운 발레 공연이 초연되고 있었다. 이 공연은 가히 충격적인 공연이었는데, 관객들이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발레의 내용이나 안무보다는 무용에 사용된 음악 때문이었다. 어떤 여성은 “작곡가가 미쳤다!”라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전해 들은 작곡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으며 이날의 초연에 만족했다고 한다. 이날 초연된 음악이 바로 라벨의 ‘볼레로’였다. 이 작품 ‘볼레로’의 파격적인 점은 같은 선율의 반복이라는 새로운 구조적 미학을 보여준 데 있었다. 연주 시간이 무려 15분에 달하는데도 계속해서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작품, 그것이 ‘볼레로’였다.

이 작품이 파리의 국립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라벨은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지금은 세계의 오케스트라들이 이 음악을 자신들의 프로그램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애초에 이 음악은 저명한 무용수였던 루빈스타인을 위해서 만든 춤음악이었다. ‘볼레로’라는 춤은 악센트가 강한 3박자를 사용하며 현악기와 캐스터네츠를 반주로 한다. 라벨의 ‘볼레로’에는 동양적인 분위기까지 수용되어 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관현악법의 천재라고 평가받았던 라벨이 악기 수를 더해가는 뛰어난 관현악법으로 또다시 천재성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음악 ‘볼레로’에 담긴 작품 속 상황은 이러하다.

“스페인의 어느 술집에서 한 여인이 볼레로 춤을 추고 있는데, 이것을 많은 남자들이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춤은 점차 가경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되는데, 남자들도 손뼉을 치며 발로 장단을 맞춘다. 나중에는 흥분한 나머지 단도를 빼들고 서로가 난투까지 벌이게 된다!”

라벨은 피아노를 기반으로 해서 먼저 곡을 쓰고 그 후에 오케스트라로 편곡하는 일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당대의 대가들도 감탄한 편곡 솜씨가 발휘되곤 했는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의 솜씨를 가리켜 ‘스위스의 시계공’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 작품 ‘볼레로’에서도 오케스트라 편곡의 ‘스위스 시계공’이 가히 최고의 오케스트라 편곡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유명한 ‘볼레로’에는 묘한 탄생 비화가 있다. 1927년이다 루빈스타인은 라벨에게 그녀가 안무를 계획한 알베니즈의 ‘이베리아’를 관현악으로 편곡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런데 라벨이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됐을 즈음에는 이미 다른 작곡가가 이 곡의 편곡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라벨은 많이 낙담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라벨의 친구가 피아노에 앉아 어떤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라벨을 발견했다. 라벨이 그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선율에서 어떤 끈질긴 힘이 느껴지지 않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곡이 ‘볼레로’이다. ‘볼레로’가 성공을 거두자 라벨 자신도 놀라고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긴 선율이 반복될 때마다 새로운 악기들이 더해지며 결국 자신의 무게에 못 이겨 선율이 무너지는 형태를 이루는 음악, 이것이 ‘볼레로’의 모습이다. 작곡가는 이 음악을 단순한 ‘실험’이라고 했지만 그의 실험은 20세기의 명곡을 낳았다. 실험을 통한 명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볼레로 선율의 강박적인 모습이 청중들에게 다가오면 청중들은 라벨의 실험 정신과 천재성에 감탄한다. ‘볼레로’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엄청나게 큰소리로 음악을 끝맺을 때까지!

글 | 이석렬
2015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5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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