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작곡가 헨델은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했으며 오늘날도 영국의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다. 바흐와 같은 해에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그의 삶은 영국에서 마감되었고 영국의 작곡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헨델이 독일의 하노버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된 것은 1710년 6월이었다.
당시 하노버의 선제후였던 게오르그는 헨델의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710년 가을에 헨델은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오페라 ‘리날도’를 영국에서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헨델이 첫 번째 영국 방문에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오페라 시즌이 끝나자 헨델은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헨델이 또다시 영국을 방문한 것은 1712년 겨울이었다. 이때 게오르그 선제후는 헨델의 영국 방문을 다시 허락했으며 헨델은 적당한 때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영국으로 향했다. 이 두 번째 방문이 헨델이 영국에서 완전히 정착하여 영국의 예술가가 되는 계기가 된다.
두 번째 영국 방문에서도 헨델은 ‘실라’ ‘테세오’ 등의 명작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그의 예술이 영국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듬해에는 ‘앤 여왕 탄생일을 위한 오드’도 발표하여 앤 여왕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그러다가 영국의 정세가 급변하는 일이 벌어졌다. 1714년에 앤 여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소식도 들려왔다. 독일에서 모시고 있던 하노버의 선제후가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인물이 바로 조지 1세이다. 독일에 있을 때 헨델은 선제후에게 휴가를 마치면 독일로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초조한 심정을감출 수 없었다. 만일 새로 즉위하는 국왕이 과거의 일을 문제 삼아 자신에게 벌을 내리기라도 한다면 커다란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노버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헨델은 조지 1세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헨델의 작품 ‘수상음악’에 대해 조지 1세와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즉 조지 1세의 뱃놀이 때에 헨델이 배에 악단을 싣고서 국왕이 좋아할 만한 음악들을 조곡 형식으로 연주했다는 것이다. 결국 ‘수상음악’은 조지 1세의 신임을 얻고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뱃놀이 당일 조지 1세가 배 위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음악을 연주하는 배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렇게 물 위에서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자 조지 1세는 저기 멀리 배 위에서 연주하는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 그때 한 신하가 헨델이라고 대답하자 조지 1세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조지 1세는 헨델의 직위를 높여주고 연봉도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지 1세의 등장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헨델이 새로이 즉위한 국왕의 노여움을 피하고 국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템즈강에서 음악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 왕실의 뱃놀이 연회는 1715년과 1717년, 1736년의 3회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 헨델이 작곡한 음악을 모은 것이 오늘날에는 ‘수상음악’이라는 제목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1717년에 초연된 ‘수상음악’은 임금과 측근들이 듣는 가운데 수십 명의 연주자들이 공연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참석한 왕의 측근 가운데는 볼튼 공작부인, 뉴캐슬 공작부인, 고돌핀 백작부인, 킬마르노크 부인, 오크니 백작 등이 있었다. 조지 1세는 이 곡을 무척 좋아하여 지친 연주자들로 하여금 세 번이나 더 연주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연주자들은 힘들었겠지만 헨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글 | 이석렬
2015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2015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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