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 까마귀 나는 밀밭
고흐 - 까마귀 나는 밀밭

[아츠앤컬쳐]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유럽 미술투어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통한다. 그 이유는 이곳에 서양미술역사 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가 생을 마감하고 묻혀 있기 때문이다. 오베르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27km 가량 떨어진 인구 7,000명의 아주 작은 전형적인 프랑스의 시골 마을이지만 매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귀를 자르고 삶에 대한 패배감에 젖어 있던 고흐는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1890년 그가 37세가 되던 해, 오베르로 올라왔고 좀 더 나은 치료를 받으며 죽기 전까지 이곳에서 10주 가량 생활하며 생애 최고의 걸작들을 남겼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 교회’, ‘닥터 가셰의 초상’ 등이 바로 그 걸작들이다. 아직도 작품 속 배경은 고스란히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 많은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 버킷 리스트 여행지로 꼽히기도 한다.

<까마귀 나는 밀밭>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작품이다. 고흐의 마지막 유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는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했다”라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 내용처럼 인생의 종말을 암시하는 듯한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죽기 한참 전에 보낸 편지에도 이 작품을 이미 언급한 것으로 보아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1890년 7월 27일 일요일, 고흐는 자신이 머물던 여인숙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페인트와 이젤 팔레트를 짊어진 채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이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쐈고 이틀 후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고흐 - 오베르의 계단이 있는 길
고흐 - 오베르의 계단이 있는 길

사실 고흐에게 여인숙을 떠난 대여섯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사람들은 그가 오랜 기간 정신병과 우울증을 알아왔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스스로 총을 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고흐는 자살한 게 아니라 불량 총을 가지고 놀던 2명의 소년들이 우발적으로 쏜 총에 맞아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고흐의 지인 중에도 고흐가 소년들이 우발적으로 쏜 총을 맞고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총을 쏜 것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타살이더라도 고흐는 자살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담담하게 그 순간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오베르교회
오베르교회

<까마귀 나는 밀밭>을 살펴보면 상단에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색조의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불길하게도 까마귀가 무리 지어 관람자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고흐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밀밭 사이로 세 갈래의 길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가 갈 길을 잃은 채 뚝 끊어져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 길을 잃은 고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림에서는 고흐가 무엇을 보고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도 오베르 성당을 왼편으로 끼고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면 고흐가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이 그림처럼 그대로 펼쳐져 있다.

사실 처음 오베르로 올라왔을 때 고흐의 상태는 점점 호전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동생 테오에게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고 그의 불안증세가 다시 깊어지기 시작했다. 편지는 이전의 다정한 편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테오가 자신의 아내의 건강을 걱정하고 어려워진 자신의 경제 사정을 실토하는 내용이었다. 평생 형에게 헌신적이었던 동생에게 자신을 향한 원망을 느꼈었던 것일까 이내 고흐는 불안한 심리적 동요를 드러냈고 자신을 점점 더 초라한 신세로 전락시켜간다. 헝클어진 외모, 철저히 고립된 생활 심지어 동네 아이들에게 좋은 놀림감이 되길 자초했다. 이때 고흐는 그의 처절한 외로움과 고립감을 창작의 소재로 승화시켰고 오베르의 외딴 까마귀 나는 밀밭을 통해 그 감정을 분출시킨다.

고흐 자화상
고흐 자화상

고흐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용기를 주었던 동생 테오 역시
갑작스런 두통과 환각 증상에 쇠약해졌고 6개월 뒤 1891년 1월 25일 33살의 나이로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 있는 병원에서 사망한다. 둘은 살아서도 떨어져 있지 못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질 수 없었던 것 같다. 테오가 죽은 뒤 이십여 년이 지난 1914년 그의 유해는 아내의 동의 하에 그림 속 밀밭 넘어 공동묘지에 묻힌 형의 곁으로 이장된다. 의좋게 나란히 서있는 두 형제의 묘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소박한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고흐와 테오의 묘
고흐와 테오의 묘

프랑스의 소도시들이 대개 낡고 조용한 분위기라 적적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오베르는 고흐의 마지막 삶이 연상되어 음습한 기운이 더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오베르를 매우 맘에 들어 했다.

“오베르는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다. 전형적이고 그림과 같은 시골의 풍경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 동생 테오에게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파리에서 교외선 국철을 이용해 한번만 갈아타면 하루에 다녀오는 것이 가능하다. 고흐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여인숙, 고흐의 병을 이해하고 교감을 나누었던 가셰 박사의 정원, 오베르 교회, 시청사 그리고 밀밭 등 고흐의 그림 속 장소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전되어 있어 파리를 방문 했을 때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오르세 미술관과 함께 방문 하면 더욱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평범하기만 한 오베르의 들녘은 고흐가 살았던 당시처럼 언제나 한산하고 고요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언제나 <까마귀 나는 밀밭>의 두꺼운 붓자국 같은 강렬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아마도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영원히 반 고흐의 마을로 기억 될 것이다.

글·사진 | 강정모
유럽가이드이자 통역안내사로 일하며 세계 유명 여행사이트인 Viator 세계 10대 가이드로 선정된 바 있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와 여러 기업에 출강하며, 아트 전문여행사 Vision tour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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