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1825~1899)는 빈의 여인들에게 열렬한 사랑으로 환영받았다. 어떤 고관부인은 이런 유언도 남겼다고 한다.

“내 장례식에서 한 곡이라도 좋으니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연주해 주시길!”

슈트라우스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당시 관광객들이 빈을 방문하는 세 가지 이유는 케른트너토르 극장, 성 스테판 사원 그리고 요한 슈트라우스를 보기 위함일 정도였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유럽 곳곳을 스타로서 드나들면서 옷차림도 최신 유행에 맞추어 말쑥하게 입고 다녔으며 심지어는 얼굴에 화장까지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최고 스타였지만 슈트라우스는 결혼을 하지 않고 30대 중반까지 버텼다. 여러 여인들을 사귀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고 있다가 37살이 되었을 때 갑작스레 결혼을 발표했다. 빈의 사교계는 발칵 뒤집혔고 여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37살의 슈트라우스가 드디어 결혼한다는 소식은 빈과 전 유럽을 강타했는데, 결혼 상대 역시 놀랄만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슈트라우스보다 7살이 많은 유부녀였다. 슈트라우스의 결혼 상대는 예티 트레프츠라는 소프라노 가수였다. 그녀의 남편은 유대계재벌 토데스코 남작이었고 남편과의 사이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슈트라우스와 예티가 서로에게 매혹된 된 것은 어느 궁전에서 개최되는 무도회 때문에 만났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순간적으로 빠르게 타올랐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예티의 남편은 아내의 새로운 결혼을 축하해주는 품위와 여유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재산의 일부도 결혼 선물로 주었다.

결혼 생활에 접어들어 예티는 슈트라우스의 아내이기도 했지만 조언자이자 매니저로서의 역할도 꼼꼼히 해냈다. 날이 갈수록 남편의 활동과 처세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일은 동생에게 맡기고 작곡에만 전념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이런 권유를 들은 슈트라우스는 실제로 지휘활동에서 은퇴하고 작곡에만 전념했다. 그래서 탄생한 곡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빈 숲 속의 이야기’ 같은 걸작들이다. 연상의 부인이 명작들의 탄생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다.

요한과 예티는 정말로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었던 것 같다. 결혼 다음날에 예티는 시동생 요제프에게 너무도 벅찬 행복감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 온 마음과 영혼이 요한에게 속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무섭도록 행복하고 축복받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최근까지 내가 당했던 그 많은 괴로운 순간을 잊을 수 있답니다!”

1870년에 어머니와 동생이 타계하여 슈트라우스가 우울증에 빠지자 반려자이자 매니저인 예티는 희가극의 작곡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러 희가극들이 작곡되었는데 그중에 유명한 작품이 ‘박쥐’와 ‘집시 남작’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자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16년간의 결혼 생활이 흐르자 예티는 60세의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 남편에게 별다른 이점이 되지 못하는 노년의 여성으로 변모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때까지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예티의 역할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예티는 1878년 4월 7일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죽음을 더 이상 우울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게 되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수많은 걸작에 기여한 연상의 여인은 공적에 비해 너무도 소탈한 죽음을 맞았다. 예티와 슈트라우스의 결합은 위대한 명작들을 낳은 지고의 결혼생활이었다.

글 | 이석렬
음악평론가,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심사위원, 전 대한민국 오늘의예술상 심사위원, 이데일리 문화대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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