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드뷔시(Debussy) 이후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곡가로 평가받는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풍부한 하모니 기술을 활용한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법을 의미하며, 어떤 악상이나 악곡을 관현악화하는 실천적, 응용적 방법, 및 그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초 과제를 연구하는 음악이론의 한 분야를 말한다. 여러 가지 악기의 집합체인 관현악(오케스트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악기와 그결합에 의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예측이 불가결하기 때문에 이를 현실화하는 수단을 의미한다.)을 보여주었다. 라벨은 수많은 관현악곡, 발레곡, 피아노협주곡 등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관현악 기법의 극치를 보여준 대작으로 흔히 ‘프랑스 발레음악의 최고봉’이라 칭송되는 작품이 바로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é]’이다. ‘3부로 구성된 무용 교향곡(Symphonie Chorégraphique en Trois Parties)’이라고 불린 이 작품을 라벨은 “아주 엄격한 조성의 설계에 의거하며, 소수 동기의 전개를 통해 전체의 균질성을 확보하는 교향악”으로 작곡했다고 한다. 실제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여느 발레음악과는 달리 매우 정치하고 유기적인 짜임새를 지니고 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원작인 ‘다프니스와 클로에 이야기[Poimenika ta kata Daphnin kai Chloēn]’는 기원전 2~3세기 그리스 작가 롱구스(Longus)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16세기 중반, 프랑스의 유명 번역가인 자크 아미요(Jacques Amyot)에 의해 프랑스어로 옮겨진 후 그리스어 원전보다 더 많이 읽혔다고 한다. 먼저 러시아 발레단의 안무가였던 미셸 포킨이 이 목가적인 로맨스를 참고하여 발레의 대본을 마련하고 이후 라벨이 수정•보완하여 1912년 전체가 완성된다. 사실 라벨의 작품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나, 소설은 다음과 같이 총 4편으로 이루어진다.
레스보스(Lesbos) 섬에서 양치기들에 의해 발견된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목동으로 자란다. 자연을 벗 삼아 친구라고는 오직 양떼들 밖에 없는 세계에서 자란 두 사람은 차츰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다. 클로에는 양들에게 아무 일이 없는데도 마음이 슬퍼지는가 하면, 그늘 속에 있는데도 불에 덴 듯 뜨거워지는 느낌이 뭘까 고민하다가 이 모든 게 다프니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클로에가 다프니스에게 장난기 섞인 입맞춤을 하고 나서 다프니스의 사랑도 불붙기 시작한다.
이후 다프니스가 해적들에게 붙잡혀 갔다 풀려나는 것으로 1편은 마무리된다. 2편에서 다시 두 사람은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가까워진다. 어느 날 레스보스 섬의 북쪽 해안에 접해 있는 메팀나(Mithymna)에서 온 부유한 청년들이 두 사람이 있던 산기슭에 배를 댄다. 이 청년들은 처음에는 다프니스를 두들겨 때려 클로에가 다프니스를 잘 보살펴 주었는데, 두 번째 왔을 때는 클로에를 납치해 간다. 이때 목신(그리스신화(神話)나 로마신화(神話)에서 숲·사냥·목축(牧畜)을 맡아보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의 형상(形象ㆍ形像)을 한 신(神)) 판의 도움으로 클로에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고, 두 사람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것으로 2편은 끝난다.
3편에서는 여자와 사랑을 나눈 경험이 없는 다프니스에게 농부의 아내인 리카이니온(Lycenion)이 일종의 성교육을 시킨다. 그 사이 수많은 구혼자들이 아름다운 클로에에게 청혼한다. 다프니스는 요정들이 선물로 준 돈으로 구혼자 자격을 얻게 된다.
4편에서는 도시에서 온 사람들 중 한 명이 다프니스를 자기 아버지인 영주에게 소개한다. 이때 소개를 해준 사람이 다프니스의 형제이고 영주가 다프니스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버지는 죽은 줄로만 알았다가 다시 만나게 된 아들 다프니스를 따뜻하게 맞아 준다. 다프니스는 이제 부자가 됐지만, 여전히 클로에를 사랑한다. 곧바로 약혼식이 거행되고 클로에도 부유한 손님들 사이에서 친부모를 만나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도시에서 살 수 있게 됐지만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지금처럼 요정들과 목신 판을 섬기면서 동물들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다프니스가 해적들에게 납치가 되었다가 풀려나지만, 해적들을 잡았는지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해적들이 잡혔다면 어디서 재판을 해야 할까? 해적에 의한 납치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2011년 1월 15일에 발생한 적이 있다. 1만 톤급 화학물질 운반선인 삼호주얼리호가 아랍에미리트에서 스리랑카로 이동하던 중 인도양의 아라비아해 입구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나라 정부는 발빠른 대응으로 해적을 잡았다. 2011년 1월 21일 특수요원(UDT)들이 청해부대 구축함인 최영함(4천500톤급)을 이용해 선원들이 피랍된삼호주얼리호에 투입되어 총격전 끝에 해적을 제압하고 선박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박을 납치한 해적 13명 가운데 8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5명의 해적은 해상강도 등에 관한 범행의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삼호주얼리호에 격리 수용되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장거리 호송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해적 5명의 입장에서도 자국인 소말리아 가까운 곳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그들을 위한 방어권 행사에 유리하다는 소송절차적 측면 등을 먼저 고려하였다. 이에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의 해적문제에 관하여 국제적인 공동 대응과 협력을 촉구하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내용 등에 따라 인접국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기대하면서 오만 등 인접국들을 대상으로 5명의 신병인도 협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인접국들은 한국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추후 다른 국가들도 동일한 요구를 할 가능성, 그리고 자국의 수용시설 여건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5명에 대한 신병인수를 거절하였다. 결국, 정부는 5명을 모두 국내로 이송하기로 하였다. 이들을 이송하기 위한 항공편 조차 마련하기 어려워서 난항을 겪던 중, 아랍에미리트연합의 협조를 받아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전용기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5명을 이송하고, 남해지방해양경찰청 소속 경찰관들이 이들을 인도받았다.
이어 검사가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부산지방법원이 피의자심문을 거친 후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마침내 국내에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해적 두목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이, 나머지 4명에 대해서는 징역 12~15년이 선고되었다.
글 | 이재훈
문화 칼럼니스트, 변호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 로보어드바이저 스타트업 ‘파운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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