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Joseph Haydn_1792
Franz Joseph Haydn_1792

[아츠앤컬쳐]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빈 고전주의 음악의 전통을 세운 위대한 음악가이지만, 그들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았다. 모차르트가 당대의 음악가로서는 최초의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베토벤이 독립 음악가로서 성공한 삶을 영위한 반면, 하이든은 거의 평생을 귀족 가문의 궁정악사로 지내야 했다. 하이든이 살던 시대에는 음악가가 독립된 활동을 하기에는 음악시장이 그리 크지 않았고, 결국 먹고 살려면 부유한 귀족의 궁정이나 교회에 들어가 그들에게 귀속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처럼 타고난 흥행사이자 기교파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최고의 작곡가도 아니었고, 베토벤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독학에 가까운 공부를 통해 음악을 하나하나 익히고 참을성 있게 꾸준히 작업하는 대기만성형이었다.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포용력으로 모차르트, 베토벤과의 극심한 성격 차이와 관점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받았다. 하이든은 스물네 살이나 어린 모차르트와 세대를 뛰어넘는 친구였으며, 서른여덟 살 터울의 베토벤에게는 엄격한 스승이었다고 한다. 결국, 하이든은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 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이 되었다. 만년에는 미사곡 천지창조(1798), 사계(1801) 등 오라토리오 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이런 하이든이 1809년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하이든의 유언대로 유해를 교회가 아닌 일반묘지, 즉 가문의 묘에 안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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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후 하이든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그의 머리가 온데간데 없어져 유족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에 유족들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하이든 유해 찾기를 공식적으로 요청했지만 그의 머리를 찾는 데 필요한 단서나 목격자가 없어 전혀 진전이 없었다. 나중에 왜 무덤이 파헤쳐졌는지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한 귀족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하이든의 뇌를 조사하고자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지만 결국 하이든의 머리는 익명의 사람에게 팔아버린 뒤였고, 이후 사방팔방 수소문하였지만 머리를 사간 사람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하이든의 머리는 유럽 전역에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다 수소문 끝에 결국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 데는 성공하여 하이든의 후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가 반환 소송을 청구하였지만, 그 유해의 주인이 반환거부권을 행사하여 후손들은 이를 되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 각 발발하여 유해반환소송이 잠정 중단되는 사태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54년 6월 마침내 하이든의 후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가 유해반환소송에 승소하여 하이든의 머리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무덤에서 파헤쳐져 머리가 분리된 지 무려 145년 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 주민 수십만 명이 거리에 나와 145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 하이든의 머리를 맞이했다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정치인들은 하이든의 미사에 대거 참석해 대음악가의 안식을 간절히 바라며 이제서야 머리를 찾은 것에 대해 하이든의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는 무덤, 즉 분묘(墳墓)를 시체나 유골을 매장하는 시설로 정의한다. 대법원 판결은 분묘를 그 내부에 사람의 유골, 유해, 유발 등 시신을 매장하여 사자를 안장한 장소라고 설명한다. 즉, 분묘는 현재 숭경한 종교적 예의의 대상으로 되어 있으며 이를 수호, 복사(服事)하는 자가 있으면 제사나 예배 또는 기념의 대상으로 하는 장소이므로, 이는 사람의 인륜도덕 내지 종교적 감정이 그대로 표현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분묘 내 유골, 유해, 유발 등 시신을 임의로 꺼내거나 훼손하는 행위는 물론이고(형법 제161조 제2항에 따라 분묘를 발굴하여 사체, 유골, 유발 또는 분묘 내에 장치한 물건을 손괴, 유기, 은닉 또는 영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있다), 분묘의 복토(흙으로 덮은 부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거하거나 이를 파괴, 해체하여 분묘를 손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형사처벌하고 있다(형법 제160조에 따라 분묘를 발굴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사건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꿈에 사망한 할머니가 등장하였는데, 할머니의 얼굴에 입, 눈, 코, 귀가 하나도 없는 형태로 나타나고, 또한 꿈에서 사망한 아버지가 “담과 철조망에서 나가지 못하니 그곳에서 좀 꺼내어 달라”고 한다는 이유로 그 묘소를 관리하는 장손 등 가족들의 동의 없이 임의대로 분묘들을 발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할머니 및 아버지의 각 분묘를 발굴한 후, 2구의 유골을 함부로 꺼내어 태우는 방법으로 손괴하고, 개장한 분묘를 파묻지 아니하였다. 이는 앞선 형법 제160조, 제161조 제2항에 해당함은 물론이고, 화장장 이외의 시설, 장소에서 화장하여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7조 제2항, 제9조 제2항도 위반하였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사건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데 올해 1월에도 아버지의 묘를 잘못 써서 자신의 아들 건강이 나쁘다는 생각을 가진 여성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지를 관리하고 처분할 권한이 있는 형제자매들의 동의 없이 아버지의 묘지를 파고 유골을 훼손하여 형사 처벌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제사를 지낸 뒤 묘를 팠고, 파낸 유골을 인근 사찰에봉안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분묘를 그대로 유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공원묘지재단의 이사장이 연고자가 나타나지 아니한 분묘들이 오랜 세월의 경과와 관리소홀로 인하여 유골이 거의 노출되어 유실될 지경에 이르자 이사장의 결의를 거쳐 신문에 공고를 낸 후 무연고 묘에 한하여 그 유골들을 파낸 후 개별적으로 표시하여 안전한 곳에 안치한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경우의 분묘발굴행위는 그 경위와 그 목적, 방법 및 의사 등 제반 사정에 비추어 사회통념상 허용될 만한 정도의 상당성이 있는 것으로서 정당행위로 인정되어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는 바 이와 같은 경우도 있다.

글 | 이재훈
문화 칼럼니스트, 변호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 로보어드바이저 스타트업 ‘파운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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