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snetsov, Alyonushka
Vasnetsov, Alyonushka

 

[아츠앤컬쳐] 니콜라이 카람진(Nikolai Mikhailovich Karamzin, 1766~1826)은 러시아 최초의 감상주의 소설 《가련한 리자(Bednaya Liza, Бедная Лиза)》(1792)를 집필하여, 러시아 문학의 감상주의 작가의 대표자로서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러시아 문학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독자들은 작품의 배경이 된 모스크바 근교의 시모노프 수도원 옆에 있는 연못에 찾아가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리자처럼 그곳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람들도 꽤나 있었다고 한다.

《가련한 리자》는 계급이 다른 남녀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상주의의 전형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가련한 리자》가 당대 서구 유럽의 다른 감상주의 소설과 다른 점은 바로 작가 카람진의 목소리를 그대로 내는 1인칭 화자의 역할과 남녀 인물의 대립적인 구도에 있다.

화자는 리자를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농노 처녀로 이상화하고 있다. 17살의 리자는 농부의 딸로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순수하고, 순결하며 헌신적인 아가씨다. 또한 쇠약해진 어머니를 부양하는 가장이자 효녀이다. 화자는 그녀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도시에서 온 귀족 청년 에라스트의 도피적이고 육욕적인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그려냈다. 소설 속의 리자는 어떤 모습일까? 카람진이 삽화를 그려 넣지는 않았으니 소설을 읽은 각 독자마다 그 상상하는 리자는 다를 것이다.

Karamzin by Tropinin(1818, Tretyakov gallery)
Karamzin by Tropinin(1818, Tretyakov gallery)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러시아의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Victor Vasnetsov, 1848-1926)가 그린 《알료누시카(Alyonushka, Аленушка)》가 리자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한다. 호숫가 바위 옆에 맨발을 드러낸 한 소녀가 앉아 있다. 쪼그리고 앉은 무릎 위에 손을 겹치고 그 위에 기운이 빠진 듯 머리를 기대고 있다. 넋이 나간 듯 물에 홀린 듯 휑하니 공허한 느낌이다. 엄연한 계급 사회였던 러시아에서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리자는 처음부터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 그림은 이러한 농노 아가씨가 처한 운명을 그려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반론도 있다. 작품 알료누시카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농노 아가씨를 그렸다기보다는 생의 막다른 길에 처한, 갈 곳 없이 내몰린 농노 소녀의 운명을 그려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감상주의 소설답게 독자의 감성을 최고로 자극하며 리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카람진과는 달리, 농노 소녀의 운명을 그린 바스네초프는 좋은 소식을 안고 온다는 제비, 치유를 상징하는 자작나무, 저 멀리 희미하게 동 터 오는 여명으로 화폭에 조금이나마 희망의 요소를 담아냈다는 것이다. 물론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구전 동화나 소설 내용으로 그린 작품이 주를 이루는 작가이므로 이 그림 또한 러시아 구전 동화인 《알료누시카와 이바누시카(Sister Alyonushka and Brother Ivanushka)》에 나오는 알료누시카일 가능성도 크다.

가령 바스네초프가 자신의 《알료누시카》가 《가련한 리자》의 리자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면 이에 대하여 원저작자인 작가 카람진은 어떠한 법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까?

학자들 중에는 ‘캐릭터라 함은 소설이나 연극, 영화, 만화 등의 인물, 역할을 뜻하 며, 우선 캐릭터의 독자적인 저작물성에 대해서는 부정설과 긍정설이 대립하고 있지만 캐릭터는 일반 대중을 구매자 층으로 삼는 상품에서 현저한 고객흡인력을 발휘하 므로 이러한 캐릭터가 영업적으로 이용되어 경제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창작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대법원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저작물이기 위하여는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어야 할 것인 바, 만화, 텔레비전, 영화, 신문, 잡지 등 대중이 접하는 매체를 통하여 등장하는 인물, 동물 등의 형상과 명칭을 뜻하는 캐릭터의 경우 그 인물, 동물 등의 생김새, 동작 등의 시각적 표현에 작성자의 창조적 개성이 드러나 있으면 원저작물과 별개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저작물이 될 수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소설 속에 글로만 묘사된 캐릭터를 그림으로 그렸을 때 이에 대하여 원저작자의 저작권 위반 여부를 판단한 사례는 아직 없다.

그렇지만 만화나 삽화가 존재하는 소설에서의 캐릭터가 아닌 이상 소설에서 글로만 표현된 캐릭터를 그림으로 그렸을 경우, 그 캐릭터의 저작물성을 침해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저작권법 제5조 제1항은 ‘원저작물을 번역·편곡·변형·각색·영상제작 그 밖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을 ‘2차적저작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바, 2차적 저작물이 되기 위해서는 원저작물을 기초로 수정·증감이 가해지되 원저작물과 실질적 유사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런데 소설 속 인물을 그린 행위는 원저작물을 기초로 수정·증감이 가해졌다기보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만 가져왔을 뿐이어서, 그림을 그린 자에게 오롯이 저작권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법원도 저작권의 보호 대상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말, 문자, 음, 색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외부에 표현한 창작적인 표현형식이고,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내용 즉 아이디어나 이론 등의 사상 또는 감정 그 자체는 원칙적으로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유명 대중 가수의 음악 앨범 재킷에 글로만 표현된 특정 소설의 캐릭터를 기본적인 아이디어로 활용하여 캐릭터를 새롭게 그린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이 미성년자인 캐릭터를 성인처럼 그렸다는 점에서 출판사에서 선정성 논란을 제기하기도 하였다(선정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법적으로 음란성하고는 무관하다고 할 것이다).

사실 책 속에서 글로만 표현된 캐릭터를 누가 어떻게 표현하든지 그 표현 자체는 자유다. 바스네초프의 알료누시카 그림이 러시아 구전 동화에 나오는 알료누시카이든, 리자이든, 또는 어떤 농노 소녀이든, 우리나라의 한 출판사는 ‘가련한 리자’의 책 표지로 바스네초프의 알료누시카 그림을 사용하고 있다. 재킷 그림에 논란을 제기한 출판사가 이렇듯 반대로 그 가수의 앨범 재킷 그림을 해당 소설책의 표지로 쓰겠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글 | 이재훈
문화 칼럼니스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 변호사/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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