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미스코리아 대회가 한때는 TV 생중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미스코리아 대회는 전 국민이 시청했고 집안에서 1등을 맞추는 게임과 동시에 전문가 못지않은 미에 대한 평을 주고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워낙 치열한 경쟁과 관심을 받으며 선발되는 위치라 그들의 이후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곤 했다. 계속되는 방송 출연과 동시에 화려해 보이는 연예계로의 진출을 가능하게 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공중파 생방송은 어디 케이블TV 방송 정도로 옮겨갔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미인대회가 왜 그리 많을까 의아한 생각이 든다. 아마 지역 특산물(고추, 사과, 감귤 등등) 명칭을 달고 나온 생소한 이름의 미인들만 해도 외우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이 현실이다. 기준을 만들어 대회를 열고 그 중 기준에 제일 적합한 한 사람을 세우는데 언제부터 이런 일이 있었을까?

우리나라는 1957년부터 한국일보 주최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53년 7월에 6·25전쟁이 끝나고 겨우 4년이 지나고 전국구 미인대회가 열렸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란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인들을 눈요깃거리로 상품화한다는 비판 아래 조금씩 공중파에서는 자리를 잃어갔지만, 아직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미스코리아 출신에 대한 환상과 추억을 약간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명 모 대학의 메이퀸(May Queen)으로 선발된 여학생은 평생 메이퀸을 자신의 접두사나 접미사처럼 달고 다닌다.

오페라에서도 미인대회가 등장하는데 1947년 영국 최고의 오페라 페스티벌의 메카인 글라인본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되었던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 ‘알버트 헤링(Albert Herring)’이다. 켐브리지 동쪽 편 Suffolk 지방의 Loxford 마을을 배경으로 전통적으로 선발하던 메이퀸을 뽑기 위해 지역의 유지들이 모여 동네 처녀 후보자들의 사생활을 현미경 검증한 결과 기준이었던 진짜 처녀를 찾을 수 없어 100% 조건에 맞는 총각 알버트 헤링을 메이킹(May King)으로 선발하고 상금도 준다. 항상 어머니의 말에 순종만 하던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마마보이라 놀리는 소리에 발끈해 가출을 감행해 사라져 버린다는 스토리다.

사람들은 헤링이 죽었을 거로 생각하지만 예상을 깨고 헤링은 받았던 큰 상금을 밤새 술을 마시는데 탕진해 버리고 거지꼴로 나타났고 한술 더 떠서 어머니가 하는 말에 난생처음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며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마마보이 최후의 반항’ 뭐 이 정도의 스토리다.

한국에서 알버트 헤링 초연을 보았을 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화성에 들리지 않는 가사를 듣다가 결국 휴식 시간에 공연장을 나왔던 기억이 있다. 이 오페라를 2년 후 영국에서 보았을 때는 영어 자막이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도 오페라가 끝날 때까지 즐겁게 잘 보고 웃다가 나왔다. 오랜 세월 쌓여 온 오페라 해석의 노하우는 필자에겐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실 이 오페라가 초연되었을 당시 글라인본 극장의 소유주 존 크리스티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에게 “사실 별로였습니다. 이 오페라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오페라가 아니군요.”라고 했단다. 하지만 38년이 지난 후 이 오페라는 글라인본이 만든 최고의 프로덕션으로 선정되었다. 연극영화과와 오페라과가 학교에 같이 있어서 무대 공연에 필요한 의상부터 무대까지 원스톱으로 제작이 가능한 학교의 시스템을 통해 체계적으로 오랜 기간 쌓아온 메뉴얼을 학생들이 그대로 배울 수 있다. 이런 오랜 기간의 끈질긴 노력과 투자는 그 이상하게 느껴지던 오페라조차도 누구라도 좋아할 수 있는 콘텐츠로 만들어가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67년간의 오페라 역사를 통해 그 제작 노하우를 쌓아 두고 있지 못하다. 오페라는 어떻게 올려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아직도 대한민국의 오페라는 실험 무대이다. 그래서 외국 연출가들 지휘자들 성악가들을 초청해 그 노하우를 감상한다. 그런데 그 노하우는 많은 자금을 쓰고도 쌓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 소비적인 인상을 주는 오페라가 아니라 생산적 노하우를 쌓아가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재능있는 사람들에게 그 노하우를 계속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오페라 연구센터가 생긴다면 10년만 지나도 경제성장의 기적처럼 오페라계의 지난 67년간의 세월보다 더 크고 빠른 발전을 이룰 것이다.

그동안 67세로 환갑이 지나도록 마마보이처럼 ‘오페라는 이래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따라가는 인생을 끝내고 동네 사람들을 자신의 가게로 초대해 과일과 먹을 것을 나누고 그의 경험을 나누어야 할 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오페라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이 우리나라에 오페라가 들어오기도 전에 외쳤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신금호
경기도 교육연수원 발전 전문위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 음악대학 /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www.mcultures.com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