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셀(Seychelles)
세이셀(Seychelles)

 

[아츠앤컬쳐]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이틀이면 충분한 세상에 살고 있음에 가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비행기를 타고 처음 구름을 내려다볼 때의 환상적인 광경과 포도에 설탕과 소주를 섞어 만든 포도주만 마셔보다 기내에서 제공되는 시큼 떨떠름한 유럽식 와인의 생소한 맛에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각자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며 전화를 할 것이며 개인 자동차를 쉽게 끌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이언스 픽션 영화에나 나올법한 미래 상상 그림을 초등학교에서 그리던 때가 얼마 전 같은데 벌써 우리의 생활은 언제 어디 있거나 아는 사람들과 어렵지 않게 연락하고 소통하고 사정이 허락된다면 당장 지구 반대편에 있는 보고픈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의 생활이 이렇게 급격하게 변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최근 필자 역시 독특한 경험을 했는데 평생 언제 가보겠는가 하는 마음에 세이셀이라는 섬나라를 소개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우연히 해변에서 올려진 결혼식을 보게 되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름다운 아프리카의 인도양 백사장 한가운데서 결혼식을 올리며 비현실적인 자연경관이라 감탄을 금치 못하는 신랑 신부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첫인상이 지나간 후에 자세히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해본 한 없이 아름다운 그곳 역시 인간이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의 땅이었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와 인도 옆 스리랑카의 중간 지점쯤 세계지도에서 맨눈으로 찾아보기 힘든 세이셀이라는 섬나라 그 나라의 수도 빅토리아의 모습은 TV에서 보던 쿠바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길거리에 많은 흑인들 하지만 유럽인들도 상당수 보였고 문화도 서구화되어있으며 집들의 형태에도 유럽의 건축양식이 많이 스며들어있다. 길거리에서 들리는 음악도 왠지 귀에 익은 랩, 힙합, 레게 음악이 흐른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항구가 있고 항구 노동자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원래 무인도였던 섬에 식민지를 건설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노예들을 데려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향신료나 목화, 과실주를 길러 식물을 대량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했던 역사가 있다. 위치상으로 거리감이 있지만 미국에 끌려온 흑인들과 매우 비슷한 환경이었다. 미국에서 목화 농장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노예제도를 통해 공급했던 것처럼 세이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낯선 땅에서 일하고 사라져야 했던 것이다. 한때는 노예로 잡혀온 그들의 운명도 오랜 세월 힘들었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게 되었고 1976년 아프리카의 세이셀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흑인 대통령까지 선출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그들의 역사와 모습 속에서 문득 떠오른 작품이 있는데. 조지 거쉰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935년 최초 공연된 이 작품은 미국의 항구를 배경으로 한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흑인이고 게다가 걷지 못하는 거지다. 오페라가 만들어질 당시에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인 것만 해도 파격적인 소재였지만 주인공마저 최악의 조합으로 공연한 참 특이한 소재의작품이다(1955년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흑인 인권운동의 발단이 된 사건이 버스에서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 안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이었는데 그보다도 20년 전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이 오페라의 등장인물은 말 없는 일부 조역들 말고는 모두 흑인들이었다. 지금도 오페라에 흑인을 꼭 출연시켜야만 공연이 가능한데 오페라의 저작권자들은 출연진과 합창단의 구성에 흑인을 꼭 출연하도록 하고 있다. 하다못해 음반제작에도 흑인을 출연시켜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달고 있는 오페라이다.

작품의 막이 올라가고 귀에 익은 멜로디 ‘썸머타임’ 재즈풍의 자장가가 들린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사랑 이야기이며 삼각관계를 넘어서 사각관계까지 이른다. 우연하게 남자친구의 폭력을 피해 ‘포기’의 안식처에 찾아온 여인 ‘베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포기’는 ‘베스’를 괴롭히던 남자친구를 살인하고 경찰에 체포되지만 다행히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문제는 그 잠시를 견디지 못하고 ‘베스’는 동네 한량이던 녀석과 뉴욕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주인공이 뉴욕으로 가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어떻게 보면 여인은 필요에 따라 남자를 갈아치우고 남자들은 그런 그녀를 위해 나쁜 일도 저지른다. 마치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보고 있는 듯하다. 힘들고 어려운 흑인들의 이야기를 재즈풍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지만 가장 작품성을 인정받는 장르가 오페라이며 지금도 많은 오페라 극장에서 올라가고 있다.

이 오페라의 등장 이후 흑인 성악가들이 세계적인 무대에 서게 되었고 다른 작곡가의 작품들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그에 비해 동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는 서양사람들이 동양인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동양인인 척한다. 작곡가와 저작권자들의 소신 있는 신념을 통해 흑인 그들만의 독점적인 레퍼토리를 구축한 좋은 예이다. 우리도 누군가 이런 작품을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최고 기량의 성악가들이 넘쳐나는 한국에 세계적 오페라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다.

신금호
경기도 교육연수원 발전 전문위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www.mcultur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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