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산업의 기둥
[아츠앤컬쳐] 인도네시아에 가보면 어디에서건 특유한 향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그리고 담배 피우는 사람들 옆에 있어보면 이러한 향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정향이라는 것이고 담배 안에 정향을 넣었기 때문에 이러한 향이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때 정향을 맛보는 것이다. 이 정향 담배를 인도네시아어로는 끄레떽(kretek) 담배라고 하는데 이는 담배 피울 때 ‘딱딱’ 소리가 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인도네시아에선 담배를 끄레떽 담배와 일반 담배로 나누는데 일반 담배를 로꼭 뿌띠(rokok putih, 백색 담배)라고 부르는 것은 적어도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맛이 없는 담배로 취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국민이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솔리친 살람이라는 학자는 1624년에 자바 귀족들은 이미 궐련 피우는 것을 즐겼다고 한 바 있다.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스도 1600년경 자바 섬에 담배가 유입되었다고 했다. 끄레떽 담배산업 이야기는 이 국가의 성공이야기와 같다. 이것은 지난 100년 동안 인도네시아 산업을 지탱해 온 중추 산업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끄레떽 산업은 국가에 돈이 유입되고, 민족 경제를 돌리며, 많은 노동력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산업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것을 창조할 능력이 있는 영리한 민족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끄레떽이 처음 등장할 당시 화란 식민통치 정부는 끄레떽 산업의 경제적 가치를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연초세는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38년 연초세는 Rp. 1,790,000로 조세 수입의 6.2%를 차지하였다. 20년 이후 이 총합은 이미 크게 올라 Rp. 244,930,000로 상승하여 조세 수입의 18.2%를 차지하였다. 다시 말해 20년 동안 무려 137배가 상승한 것이다. 최근에도 이 수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즉, 끄레떽으로 인한 연초세가 정부 조세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끄레떽 담배의 선구자는 19세기 말 꾸두스(Kudus)지역에 살던 하지자마리(Haji Djamari)라는 인물이다. 그는 가슴 부분에 통증을 느껴 아픈 부위에 정향기름을 문질러보았다. 결과적으로 통증은 다소 감소하였다. 그는 이후 정향을 얇게 썰어서 궐련에 넣어 피웠다. 그 ‘정향담배’를 핀 이후, 통증은 점차 더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듯, 얼마 동안 매일 이 ‘정향담배’를 핀 이후 하지 자마리는 그의 병이 이미 모두 나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하지 자마리는 많은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향담배’의 생산자가 되었다.
그 후 토착인들과 화교들 간의 경쟁을 거쳐 끄레떽 담배 산업은 발전을 계속했다. 니띠세미또(Nitisemito)는 ‘끄레떽 왕’으로 불리며 현대식 경영을 도입한 끄레떽 사업 선구자로 유명하다. 관리시스템과 회계시스템을 서구식으로 바꾸고 홍보의 비중도 크게 늘린 것이 유효한 것이다. 현재 인도네시아의 주요 끄레떽 담배 회사로는 지삼수(Dji Sam Soe), 구당 가람(Gudang Garam), 삼뿌르나(Sampoerna), 자룸(Djarum) 등이 있다.
금연이 대세인 시대에 인도네시아 산업의 기둥 역할을 했으며 문화 아이콘의 하나로 성장한 끄레떽 담배가 어떻게 발전해갈 지 궁금하다.
글·사진 | 고영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