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기획부터 세부 사항 하나하나 공을 들여 격년으로 다녀왔던 유럽 음악여행. 내년에는 프랑스에 가기로 했다. 필자의 여행 리스트에서 애써 외면하던 프랑스 파리를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건너뛸 수 없게 되었다. 파리는 내로라하는 예술가들과 극장들 그리고 어마어마한 무대 뒷이야기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어쩌면 파리는 보고 또 봐서 결과를 뻔히 아는 영화 같은 이미지의 도시지만, 결코 한 사람의 지적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도전할 엄두가 안 나는 카테고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종주국이라 한다면 그 명성을 인터셉트한 곳이 바로 프랑스 파리다. 당대 가장 부유했던 메디치가의 여인 둘이 프랑스 왕궁의 안주인이 되었고 그들이 프랑스로 들여간 물품들, 예법, 사상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인재들이 프랑스에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는 큰 공을 세웠다. 이탈리아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무덤은 그의 조국이 아닌 프랑스에 있는데, 이는 자신을 알아준 나라 프랑스에 묻히길 원했던 다 빈치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이야기는 14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가 도시국가로 나뉘어 밀라노, 만토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이 북부 이탈리아에서 상호 견제하며 패권 경쟁에 몰두하고 있을 때 피렌체에서 충분히 대접받지 못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작에게 이력서를 보내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된다. 그러나 1500년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일자리를 잃은 다 빈치는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거쳐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유명세는 최후의 만찬으로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고 한때 메디치 가문을 몰아냈던 금욕주의 신권 정부가 몰락하면서 피렌체가 다시 메디치 가문의 손으로 들어갔을 때였기에 문화예술계가 기를 활짝 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어 도시의 왕족과 귀족들의 예술에 대한 펀드가 넘쳐났다. 특히 상업과 금융의 발달로 부르주아 상인 계급으로 부가 쏠리기 시작하면서 각 산업의 조합들은 경쟁적으로 예술작품을 공공장소에 기증하기 시작했고 신흥 재벌 가문의 작품 의뢰가 넘쳐나 예술가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보티첼리, 바사리 등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예술가들이 동시대에 살고 있었으니 그 분위기를 상상하기만 해도 흥분되는 시대였다.
다 빈치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은 아마 루브르 박물관을 먹여 살리는 모나리자일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 관객의 80%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왔다고 설문에 답할 정도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나리자가 그렇게 유명한 작품이었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프랑수아 1세가 루브르에 기증하면서 여러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기 시작했는데, 한번은 루브르의 엄중한 경비를 뚫고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진 사건이 발생한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110년 전인 1911년의 일이다. 이 사건으로 과거 장물 매매에 연루된 전력이 있었던 피카소가 용의 선상에 올라 조사까지 받은 해프닝이 발생했을 정도로 예술계의 큰 스캔들이었다. 그림의 행방은 한동안 오리무중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포기하던 시점에 갑자기 범인이 잡히고 그림도 멀쩡하게 되찾았다.
모나리자는 그녀의 고향인 피렌체에서 발견되었는데 사건의 진상은 이탈리아인 빈첸조 페루자가 어마어마한 애국심으로 그림을 훔쳤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주목한 스캔들이 무사히 마무리되자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모나리자를 보려는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고 다른 작품들 사이에 전시되던 모나리자는 결국 홀로 하나의 벽을 차지하여 지금은 3중 방탄 유리관으로 철저한 경호를 받으며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실제로 보면 아담한 크기의 소박한 그림이니 한편으로 그 가치를 알아보고 훔친 도둑의 안목이 놀랍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왜 평범한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지, 왜 이 여인은 눈썹이 없는지,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지, 당대 초상화의 일반적인 룰은 왜 따르지 않았는지, 그녀의 표정은 미소인지 무표정인지, 주인공을 두고 왼쪽과 오른쪽 배경의 지평선은 왜 다른지, 어느 방향에서 바라봐도 관객과 늘 눈을 맞추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건 왜인지.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미완성이라고 한다. 아직 채색이 끝나지 않은 부분도 있고 의뢰인에게는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로 13년간 계속 그리고만 있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한 구석들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파리에서 모나리자가 사라진 때 독일에서는 바그너 추종자들로 구성된 바이로이트 서클의 멤버였던 막스 폰 쉴링스(Max von Schillings)는, 푸르트 뱅글러의 스승이면서 당대 여러 오페라 극장의 감독 자리를 쥐고 있던 꽤 영향력 있던 작곡가 겸 철학자였다.
1911년 그가 비엔나 출신 시인이자 배우인 베아트리체 도브스키의 연극 <고디바>를 보러 갔을 때 베아트리체는 쉴링스에게 자신이 쓴 대본을 보여주었고, 도난 사건으로 시끄러운 때 세간의 이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쉴링스는 곧 바로 오페라를 쓰기 시작해 1915년 9월 26일 슈투트가르트 극장에서 초연을 올렸다. 이 오페라는 이후 비엔나, 베를린, 부다페스트 등 주요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했다.
오페라는 그림 속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견디고 있는 모나리자의 이야기로 그녀는 부잣집 아들 프란체스코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지만 나이 차에서 비롯된 듯한 의처증에 질려버린 상태다. 어느 날 교황의 대사 조반니 살비아티가 최고급 진주를 구입하려 프란체스코를 찾아온다. 진주는 그 가치를 보전하기 위해 거의 진공상태의 금고에 보관 중이었고 금고는 잠기는 순간 내부에서 1시간을 버틸 정도의 산소만 존재하는 밀폐된 공간이다.
그런데 진주를 사러 온 조반니는 아름답지만 불행해 보이는 모나리자에게 반해 함께 로마로 도망치자고 제안하는데, 그녀의 남편이 이를 눈치채 조반니를 금고에 가두고는 모나리자 눈앞에서 금고 열쇠를 아르노강에 던져버린다. 이 충격에 기절한 모나리자는 다음날 눈을 뜨고 조반니의 명백한 죽음에 낙심한다. 그때 프란체스코의 딸이 강가의 배에 떨어진 금고 열쇠를 발견해 모나리자에게 전해주고 이 열쇠를 프란체스코에게 보여주니, 당황한 그는 혹시라도 조반니가 도망쳤는지 확인하러 금고에 들어간다. 그러자 모나리자는 금고를 닫아 버린다. 남은 시간은 1시간. 물론 모나리자는 1시간 내로 문을 열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림 뒤에 있을법한 상상 속의 비극을 오페라로 남긴 바그너의 후예 쉴링스와 도브스키. 모나리자를 복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독일인들이다. “만들기는 이탈리아에서 만들었는데 왜 써먹기는 다른 나라들에서 그것도 이상하게 써먹냐고!” 모나리자를 훔쳐 피렌체의 벽난로 아래에 숨겨둔 도둑 빈첸조 페루자의 분노가 한편으로 깊게 공감되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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