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사랑과 출생의 비밀 그리고 복수

 

[아츠앤컬쳐] 질투란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한편 방향과 정도가 잘못되면 파멸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이들의 경쟁이 선을 넘기 시작하면서 서로에 대한 비방에 열을 올리다 보면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저지르게 되고 글자 그대로 철천지원수가 된다. 요즘같이 여러 스캔들이 터지며 서로를 향한 비방이 난무하는 선거철에는 아주 노골적인 암살의 대표 격인 JFK의 케이스와는 다른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비밀스러운 독살 스토리 쪽을 떠올리게 된다.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1859)>는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일어난 정치적 암살을 소재로 했고, 같은 작곡가의 <시몬 보카네그라(1857)>는 측근의 은밀한 독살 이야기를 다룬다. 160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 봐도 익숙한 출생의 비밀, 금지된 사랑, 부녀자 납치 등 아슬아슬한 소재들이 혼재된 줄거리의 오페라다.

이탈리아가 아직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공국으로 구성됐던 시절,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 베니스 공국과 함께 제노바 공국이 위세를 떨쳤는데 제노바 총독이었던 실존 인물 ‘시몬 보카네그라’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를 소개하고자 한다.

왕족과 귀족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18세기 프랑스혁명에 의해서만 무너졌던 것은 아니다. 이미 영국에서는 13세기 존왕의 실정을 계기로 마그나카르타(1)를 만들어 왕의 독점적인 권력을 분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제노바의 시몬 보카네그라 총독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 권력을 등에 업고 자리에 오른 인물로서 집권 6년 만에 하야했다가 10년 만에 재집권한 후 독살당한 인물이다.

암살 시도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분명 반란 세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작품상 정치적 연적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결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반란 세력이 아닌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측근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Giuseppe Verdi, Simon Boccanegra first edition libretto for the 1881 revision of the opera
Giuseppe Verdi, Simon Boccanegra first edition libretto for the 1881 revision of the opera

이런 이탈리아의 역사적 인물을 소설로 그려낸 이는 스페인 출신 작가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티에레즈(1813~1884)였고,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가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오페라 <Simon Boccanegra>(2)를 썼다.

구티에레즈의 또 다른 소설 <El Trovador(음유시인, 1836)> 역시 베르디에 의해 동명의 오페라 <Il Trovatore, 일 트로바토레(1853)>로 무대에 올랐다. 구티에레즈는 자신의 작품이 스페인에서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쿠바와 멕시코로 이민을 갔다가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는데,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 그의 소설이 베르디 오페라의 원작으로 유명세를 타며 구티에레즈는 하루아침에 스타 작가가 됐다. 역시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Verdi's grand opera "Il trovatore"
Verdi's grand opera "Il trovatore"

시민 권력을 등에 업고 선출된 시몬 보카네그라와 달리 귀족 세력이 배경이었던 전 총독 피에스코에게는 마리아라는 딸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딸이 아버지에 대항하는 시몬과 사랑에 빠져 손녀까지 출산한다. 격노한 아버지 피에스코는 한동안 딸의 가택연금을 명령한다. 가택연금이 끝나고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마리아로부터 오페라는 시작된다.

한편, 차기 총독으로 시몬이 선출되면서 그는 당당하게 마리아와의 결혼 허락을 구한다. 피에스코는 시몬에게 마리아의 죽음을 숨기고 둘 사이에 출산한 아이를 넘기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겠다 하지만, 이미 아이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시몬은 피에스코의 제안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내 연인 마리아의 시신을 발견하고 절규하는 시몬.

이것으로 시몬과 피에스코, 전직 그리고 현직 총독 둘은 돌이킬 수 없는 원수 관계가 된다. 그렇게 25년의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가 다 그렇듯 어마어마한 우연이 계속되는데, 25년 전 잃어버렸던 시몬의 딸 아멜리아는 궁에서 일하고 있었고 안드레아로 개명한 피에스코가 아멜리아를 돌보며 살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체는 모른다.

이 25세의 아름다운 처녀 아멜리아에게는 ‘가브리엘레’라는 연인이 있었다. 그런데 시몬이 권력을 잡도록 도왔던 측근 파올로가 아멜리아와 어떻게든 결혼하고 싶어 하자, 아멜리아는 단호히 거절하며 자신에겐 애인도 있고 사실은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라며 소중히 간직한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여준다. 초상화를 본 시몬은 아멜리아가 바로 잃어버린 자신의 딸임을 깨닫는다.

한편 아멜리아의 연인은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시몬에 대항하는 귀족파의 선봉장이었다. 벌써 꼬인 느낌이 확 든다. 소식을 들은 파올로는 이유도 모른 채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차였고 믿고 있던 주군은 뭐라 설명도 없으니 분기탱천해 아멜리아를 납치하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 오히려 궁지에 몰린다.

아멜리아가 시몬의 정부라는 거짓 소문을 듣고 분노한 가브리엘레는 시몬 앞에서 칼을 꺼내지만, 아멜리아가 그의 딸임을 알게 되자 급히 진영을 바꿔 귀족파 반란군을 제압한다. 결국 납치의 주범으로 밝혀진 파올로는 처형당한다.

오해가 풀리고 난리가 진정되자 아멜리아와 가브리엘레는 부부의 연을 맺지만 하필 시몬의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져 급기야 쓰러지기까지 하는데, 파올로가 죽기 전 마지막 복수로 시몬의 음료에 독약을 탔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급히 악화된 시몬은 사위를 차기 총독으로 임명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이 교차하며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비극은 사소하게 엇갈린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거절당한 사랑을 핑계로 여자를 납치하고 그것이 미수에 그치자 상대방을 파멸시키려 거짓 스캔들을 폭로하는 등의 만행 끝에 더 나아가 당사자의 아버지까지 독극물 살해하는 인물 파올로를 보면서, 최근 세간을 어지럽힌 범죄자들이 전광석화로 뇌리를 스칠 정도로 매우 익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지구 반대편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나날이 발전하는 의학으로 평균수명은 비할 데 없이 올랐지만, 인간이란 존재의 나약함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걸까.

(1) 존의 실정(失政)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 조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교회의 자유, 봉건적 부담의 제한, 재판 및 법률, 도시 특권의 확인, 지방관리의 직권남용 방지 등 여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본래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專制)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근거로 이용된 일을 계기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빈번히 인용되었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2) 1857년 베니스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했으나 대실패로 끝났던 작품을 23년 후 악보 출판사의 설득으로 훗날 ‘오텔로’, ‘팔스타프’의 대본을 쓰게 되는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와 함께 대본을 수정하고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공연(La Scala in Milan 1881년 3월 24일)하면서 오페라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신금호
신금호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www.mcultur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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