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출신의 이탈리아 화가였다. 어떠한 화가도 티치아노 이상의 화가일 수는 없었다. 아마도 벨라스케즈나 반 고흐만이 그와 색채 감각과 취향이 비슷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유일한 화가였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는 베네치아 근처의 산, 피아베 디 카도레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베네치아의 선박을 만드는 나무들이 가득한 매우 특별한 곳으로, 그의 가문은 1240년부터 베네치아와 목재를 거래해온 오랜 전통의 부유하고 귀족적 가문이었다.
9살의 티치아노에게서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 부모는 당시 베네치아의 공직에 있던 삼촌 안토니오에게 그와 형제 프란체스코를 보냈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화려함의 정점에 있었고, 조르조네, 카르파치오, 로렌조 로토, 조반니 벨리니와 같은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베니스 공화국의 공식 화가인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 들어가 밝고 빛나는 유화의 색감을 배웠다. 그는 벨리니의 제자로서, 견습 기간 동안 11살 연상인 조르조네의 조수로 일했으며, 1511년 베네치아에 퍼진 전염병으로 조르조네가 사망했을 때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드레스덴의 비너스>를 완성하기도 했다.
스무 살도 안 된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의 제자로서,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의 상품을 수집하던 베네치아의 궁전, 폰다코 데이 테데스코(Fondaco dei Tedesco)의 프레스코화에 참여했다. 오늘날 폰다코 데이 테데스코는 고급 쇼핑센터로 프레스코화들은 수거되어 베네치아 궁전 카도로(Ca 'd'Oro)에 보존되어 있다.
인도로 가는 길, 즉 대서양 항로가 개통되며 점차 지중해의 중요성이 줄어들자, 부유한 베네치아 귀족은 바다와 가까워지는 대신 본토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사람들이 토지 구입과 건설에 투자하며, 브레시아와 베르가모에 농업지역이 개발되었다. 삶은 더 편안하고 세련되어졌고, 베네치아는 ‘원하는 모든 것을 풍족하게 얻을 수 있는’ 풍요의 왕국이었다. 베네치아는 문화의 수도가 되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뒤러, 미켈란젤로와 같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머물렀다.
티치아노는 이 위대한 혁신과 문화적 장소에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베네치아 화가들의 전형적인 색조 즉, 색상의 톤이 반사광의 양으로 정의되는 기술을 배웠다. 즉 물체가 밝을수록 더 밝게 보이고, 어두울수록 더 어둡게 나타나는 기술로, 이를 그림에 사용하면 전례 없는 3차원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새로운 스타일로 빠른 색상의 선택, 예비 도면 없이, 부정확한 윤곽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생생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새로운 이미지의 기법이 탄생했다.
티치아노는 단기간 내에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다방면의 재능으로 주제가 무엇이든, 세심하고 세련된 색감의 사용과 공간 속 인물들을 혁신적으로 배치하여 그의 작품의 특성과 상품성을 드러냈다.
그의 전환점은 1513년으로, 당시 그는 교황 레오 10세의 초대를 거절하며 베네치아에 머무르며 베네치아를 기쁘게 했다. 이를 계기로 1516년 거장 벨리니에 이어 세레니시마 공화국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었다.
티치아노는 훌륭한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능숙한 기업가였다. 그는 작품의 양도시기를 미루며 그의 작품의 가치를 높였고, 타 분야에까지 투자를 다양화했다. 티치아노는 이탈리아의 교황 가문들을 위해 일하면서 또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를 위해 일했다. 당시 카를 5세는 유럽에서 아메리카까지 왕국을 소유한 위대한 황제였기 때문에 티치아노는 후기 르네상스 궁정의 작은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화가로서 새로운 길을 열어 수요가 있는 모든 곳의 국제적 예술가가 되었다.
티치아노는 노년기에 이르러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밝은 색을 포기하고, 어두운 색상과 명암의 효과로 스타일을 과감하게 변경했다. 이러한 실험은 동시대에는 높이 평가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티치아노는 이 ‘파토스’의 씨앗을 뿌렸고, 바로크 초기와 그 이후 화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채택되어 1800년대의 위대한 화가들에게까지 받아들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한 사람은 없듯 100세가 다 된 노년의 티치아노는 16세기 후반, 수십 년간 베니스를 덮친 새로운 전염병에 맞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비록 청년기에 친구인 조르조네를 앗아간 흑사병을 면했다하더라도 말이다. 전염병은 그의 아들 오라지오에 이어 1576년 8월 27일 그마저 데려갔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iverisität Berlin, Facilitator at Osho Resort, Poona In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