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assar Oil_Thomas Rowlandson(1814)
Macassar Oil_Thomas Rowlandson(1814)

 

[아츠앤컬쳐] 토마스 롤런드슨(Thomas Rowlandson, 1756~1827)은 175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은 런던의 유명 방직업자였는데, 섬유 무역업을 하기 위해 과도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1759년 파산 선고를 받고는 결국, 런던에서의 생활을 접고 1759년 말 가족과 함께 토마스의 삼촌 제임스가 있는 노스요크셔(North Yorkshire)로 이사를 한다. 그런데 삼촌 제임스도 1764년에 사망했고, 사실상 숙모 제인이 토마스 롤런드슨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777년 숙모 제인이 사망하자, 그는 당시 약 7,000파운드를 상속받고 동네 술집에서 도박판을 벌여 며칠 만에 재산을 탕진했다는 일화도 있다.

롤런드슨은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Academy)에서 6년을 공부했는데, 그 중 2년은 장 밥티스티 피갈(Jean-Baptiste Pigalle)에게 수학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가인 피갈에게 인간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을 배운 덕분에, 인간 본성을 꿰뚫는 풍자화를 그릴 수 있는 양분을 키울 수 있었다. 롤런드슨은 인체 드로잉 수업 중에, 여성 모델에게 콩알탄을 쏴서 아카데미에서 거의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독특한 사건을 만들었던 그의 본능은 어떤 사람의 특징을 과장하여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림을 일컫는 캐리커쳐(caricature)라는 장르와 만나면서 인간 본성의 결점과 야비함을 조롱하는 작품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출되게 된다.

당대의 일반적인 풍자 만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롤런드슨의 초기 작품들 역시 나폴레옹(Napoléon I, 1769~1821)을 풍자하는 주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그의 특기는 정치적인 풍자라기보다는 사회적인 풍자였다. 롤런드슨은 생기 넘치는 놀라운 제스처와 표정의 인물 표현으로 유명했다. 때로 그의 그림은 조잡하고 상스러웠고, 어떤 때에는 소름끼치고 신파적이었으며, 또 다른 때에는 익살스럽고 상냥했다.

그의 작품들은 미묘한 조롱과 우스꽝스러움에 대한 찬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롤런드슨 그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개개인의 유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골생활이나 도시생활과 같은 사회적인 유형을 묘사하는 데 있다. 또한 그림 속에 신체적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을 고의로 배치한 것 역시 특징적이다. 롤런드슨 익살의 대부분은 모두 재미있게 묘사된 젊은이와 늙은이, 괴상한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와 같은 등장인물들의 극단적인 병치에서 파생된 것이다.

롤런드슨의 1814년 작품인 『마카사르 오일(Macassar oil)』을 보면, 미용사가 팔걸이 의자에 앉은 뚱뚱한 대머리 노인의 머리에, 병에 든 마카사르 오일을 붓고 있다. 노인의 발 사이에는 넘쳐나는 오일을 받아주는 대야가 있고, 땅에는 특이한 모양에 ‘바보’라고 새겨진 모자가 있고 그 뒤에는 벽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는 갈색 머리카락의 충격을 받은 여인이 서 있다. 마카사르 오일이 대머리 남성의 모발 성장을 자극할 것이라는 일부 광고의 잘못된 주장을 비웃는 작품이다.

The Sculptor_Thomas Rowlandson(1800)
The Sculptor_Thomas Rowlandson(1800)

또한 롤런드슨은 영국에서 흉상 조각을 대중화하는데 일조한 조셉 놀레켄스(Joseph Nollekens, 1737~1823)을 캐리커처로 그렸다. 그림에서는 로마에서 가져온 석고(테라코타(TERRA-COTTA)), 골동품의 조각들이 놀레켄스의 작업실을 가득 채운다. 당시 60대인 놀레켄스는 다음 왕립아카데미 전시회를 위해 제작된 비너스와 큐피드의 점토 모형을 작업하기 위해 안경을 쓰고 있는데, 그는 음탕한 표정과 상기된 뺨으로 조각상 속에 앉아 있는 누드를 감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풍자 그림으로 인한 공직선거법 위반 이슈가 벌어지기도 한다. A는 팝아트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다. A는 시내 일대 버스 및 택시정류장 광고판에 '청와대를 배경으로 백설공주 옷을 입은 후보자가 왼손에 전(前) 대통령의 얼굴이 중앙에 인쇄되어 있는 사과를 들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벽보'를 5~10매씩 나누어 부착하였다.

「공직선거법」에는 누구든지 선거일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ㆍ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벽보 등을 배부ㆍ살포ㆍ게시 등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우리나라 법원은 먼저 A가 후보자 등이 그려진 벽보를 제작하여 공공장소에 부착한 사실 자체는 인정하였다. 그러나 우선 벽보를 부착하게 된 A의 의도를 보건대, A는 팝아티스트로서 기존의 실내 갤러리 위주의 전시미술에서 탈피하여 길거리를 표현의 공간으로 삼는 새로운 형태의 퍼포먼스를 기획하였고 그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이 벽보 역시 그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마침 대선이라는 이슈와 관련하여 시사성이 짙은 인물들을 예술활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 뿐, 특별히 대통령선거에 맞추어 비로소 기획되어 제작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후보자가 청와대를 배경으로 백설공주의 옷을 입은 채 전(前) 대통령의 얼굴이 들어있는 사과를 들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을 뿐 벽보 어디에도 후보자를 지지ㆍ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 기타 그 어떠한 문구도 기재되어 있지 아니하고, 후보자의 얼굴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인물의 동일성을 식별할 수 있는 외모상의 특징을 사실적으로 부각시켰을 뿐 악의적인 표현상의 왜곡이나 변형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벽보의 인물과 배경의 구도, 색감,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 등을 종합하면 벽보는 시사적 인물과 관련된 소재를 활용한 회화로서의 심미적ㆍ예술적 가치가 더 도드라지는 점, 뒷배경으로 청와대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후보자를 반대한다는 것과는 달리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예견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해석될 여지가 있는 점, 후보자가 사과를 든 백설공주로 묘사된 것은 당시 국내 언론이 사용하던 후보자의 별명을 후보자를 상징하기 위한 관련 소재로 활용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뿐 지지 혹은 반대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점, 백설공주 동화의 내용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 그림이 후보자에 대한 호감 또는 비호감을 표현한 것인지 불분명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위 벽보는 후보자를 소재로 한 예술창작 표현물에 불과하고 후보자를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하였다.

 

글 | 이재훈
변호사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감사위원
성신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법학(J.D.), 기술경영학(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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