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ibale Carracci, Ceiling Galleria Farnese, 1597-1601, Palazzo Farnese, Roma
Annibale Carracci, Ceiling Galleria Farnese, 1597-1601, Palazzo Farnese, Roma

[아츠앤컬쳐] 봉건과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여러 문화 중심지로서 지방 자치단체나 황실의 정치, 사회, 문화적 경향을 대변했다. 동시대의 독일, 프랑스,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아직 통일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문화 중심지들은 지역의 행정과 경제의 주도권을 가진 부유 가문에 의해 관리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지속적 전쟁과 함께 침략과 지배를 일삼는 유럽 강대국들의 전장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아름다운 시기’로 알고 있는 르네상스도 사실상 평민들에겐 전쟁, 파괴, 굶주림의 시기였으나 반면에 예술에서만큼은 매우 부유한 시기였다. 예술가들은 최대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왕권의 후원을 받았으며,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연구했다. 이때의 정치적 상황은 유럽 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독창적 개성을 창출하게 했다. 아마도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략과 여러 도시와 황실 간의 전쟁이 없었다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개성과 창의성은 떠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Annibale Carracci, Elemosina di san Rocco, 1595, Dresda.
Annibale Carracci, Elemosina di san Rocco, 1595, Dresda.

로마, 나폴리, 피렌체, 밀라노, 만토바, 베네치아 그리고 볼로냐를 위시한 수많은 도시들은 훌륭한 문화 중심지로 다양한 예술가와 화파의 만남의 장소였다. 일반적으로 로마가 특별히 문화 중심지로 여겨지는 이유는 저명한 가문의 정치적 표명 대상인 교황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모든 유럽 및 이탈리아의 귀족과 왕실, 황제들은 그들의 통치에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교회에 돈을 지불했다. 이로 교황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로마의 훌륭한 건축물과 로마 외곽의 교황 별장들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로마 외에도 이탈리아의 예술적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 중심지는 볼로냐였는데, 볼로냐 화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볼로냐 화파는 14세기~20세기 사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다양한 사건과 운명 속에서 왕성히 활동한 수많은 화가들의 복합체다. 이 수백 년 기간에서 특히 세계적 수준의 번영기로 카라치 가문과 그 제자들의 활동기인 16~17세기를 꼽는다.

Annibale Carracci, Autoritratto, 1593
Annibale Carracci, Autoritratto, 1593

볼로냐 화파의 거장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는 1560년 볼로냐의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견습을 시작한다. 안니발레는 사촌 루도비코(Ludovico), 형제 아고스티노(Agostino)와 함께 1582년 공동으로 보테가(Bottega)를 설립, 운영하기 시작함으로 경력을 쌓아간다. 이들은 그곳을 명성과 배움을 위한 ‘열망의 아카데미(Academia dei Desiderosi)’로, 후에는 ‘약진적(Incamminati)’ 아카데미로 개명하며 새로운 스타일에 개방된 진보적 예술가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의 화파는 라파엘로(Raffaello)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등 피렌체파의 선형 기법에 주의를 기울이고, 색과 사물의 정의로는 티치아노(Tiziano)와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을 모범으로 삼는다. 이러한 화풍은 카라치 형제가 1580년~1581년에 아버지의 권유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배운 영향이기도 하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위대함은 1500년대 이탈리아 회화 전통의 회복을 꾀함에 있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수많은 화파들이 독창성과 성숙함을 갖추고 서로 통합되었으며, 라파엘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티치아노, 베로네제(Veronese)와 같은 훌륭한 예술가들의 작품성과 경향이 보존되었다. 카라치의 예술적 바탕은 뛰어난 르네상스 전통의 현대화와 동시에 진정한 모방의 부활이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바로크(barocco)의 창시자를 카라바조(Caravaggio), 루벤스(Rubens) 그리고 안니발레 카라치로 꼽는다.

무엇보다 카라치의 아카데미에서 주목할 점은 안니발레의 아버지가 주관하던 사립 아카데미 또는 시설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후기 매너리즘 화가들의 풍습을 고수하던 타 아카데미들과는 달리 카라치의 아카데미는 현대적 모방을 권유했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창조성과 잠재력이 결여된 기존 방식을 반복하기보다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작품들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며 연구하는 새로운 방식의 현실적 회화법을 배웠다.

안니발레는 1580년대부터 수년간 파르마와 베네치아의 후원으로 양쪽에 거주하며 예술가로서의 발전을 꾀한다. 이 여행기의 끝자락인 1595년, 그는 드디어 유명한 작품 <산 로코의 희사(l’Elemosina di San Rocco)>로 바로크 문화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 작품은 동시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데 작품에서 비롯된 수많은 판화들이 이를 증명한다. 안니발레의 빠른 적응력은 반종교 개혁(Controriforma) 시기에도 가장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게 되고, 반개혁 정신을 고취시키는 예술 작품들을 탄생시킨다.

이후에도 볼로냐의 기념비적인 프레스코화들과 에밀리아의 작품들로 최고의 명성을 얻으며 파르네제(Farnese) 추기경에게 고용되었다. 역대 교황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파르네제 추기경은 그를 형제 아고스티노와 함께 로마 파르네제 궁(Palazzo Farnese)의 장식에 위임했고, 그 소문으로 부유한 후원자들을 얻게 되었다. 파르네제 궁에서 안니발레는 고전 신화들을 다시 읽으며 라틴 시인 오비디우스(Ovidio)를 회상시키는 프레스코화들을 탄생시켰다. 추기경 가문의 궁중 화가 대우를 받던 그는 파르네제 궁뿐 아니라 전 집안의 회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조건으로 거액의 급여를 받았다.

그는 그림 제작뿐 아니라 파티를 위한 임시 설비 및 궁전들에 사용되는 가구 디자인까지 도맡았으며, 로마의 타 후원자들을 위해서도 일했다. 서서히 안니발레의 작업은 풍경화까지 미치게 된다. 청년 시절 베니치아와 파도바에서 연구한 베네치아식 작품들과 더불어 로마에서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새로운 경향의 풍경화를 개발한다. 그의 혁신성은 자연과 사람 사이의 균형에 도달하였는바 즉, 자연이 그저 배경으로서만 제한되지 않고 사람 또한 자연 안에서 살며 더불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니발레로 인해 풍경화의 새로운 개념이 시작되며 이후 2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안니발레는 판화와 초상화의 연구도 같이 이어 나간다.모든 사람이 세상을 떠나듯 안니발레 또한 죽었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이나 매독을 거론했다. 얼마 후 1609년 바로크가 시작되었으며 회화의 장에는 전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며 모든 회화를 변형시킬 새로운 시대의 카라바조가 나타났다.

그러나 안니발레 카라치 작품들을 존중했던 카라바조는 그를 위대한 화가로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행복하다. 이 시대에 또 다른 화가를 만날 수 있음에...”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verisität Berlin, Manager at Osho Resort, Poona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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