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ugino, The Delivery of the Keys to Saint Peter, 1482, Cappella Sistina, City of Vatican, Rome
Perugino, The Delivery of the Keys to Saint Peter, 1482, Cappella Sistina, City of Vatican, Rome

15세기의 뛰어난 화가 페루지노는 많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유럽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1400년대 움브리아에는 민감하고도 우아한 빛의 색을 강조한 화파가 활동했다. 화파의 창시자는 피에트로 반누치(PietroVannucci)로 1448~1450년경 치타 델라 피에베에서 태어났으며, 페루지노라 불렸다. 그는 피렌체의 베로키오(Verrocchio)를 사사하며 보티첼리(Botticelli)와 레오나르도(Leonardo)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한 조토(Giotto)와 함께 근대 유럽회화를 바꾼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에게서 원근법과 공간감을 익혔다.

부유한 집안의 페루지노는 1467년 피렌체로 옮긴 후 뛰어난 기술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 등 부유한 자본가들로 상업적 대도시였다. 페루지노가 몸담았던 베로키오의 공방은 최고의 학교이자 도장이었으며, 이곳에서 당대의 재능 있는 인물로 레오나르도를 비롯하여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를 만나 교류하게 된다.

Raffaello, Portrait of Perugino, 1506 Gallery of Uffizi, Florence
Raffaello, Portrait of Perugino, 1506 Gallery of Uffizi, Florence

1400년대 중반은 르네상스와 피렌체의 문화적 유산과 더불어 예술 및 경제 활동의 보고이자 교류의 장으로 정의된다. 당시 피렌체의 회화 교육은 무엇보다 교회나 풍경, 환경 등 실물의 복제를 기반으로 했으며, 이는 모든 회화적 기술을 습득하는 기본 활동이었다. 종종 시체를 직접 연구하고 광범위하게 해부학적 조사를 했는데, 당시 피렌체파는 화질과 윤곽선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페루지노는 9년간의 연구 끝에 1472년 견습 과정을 마쳤고, 정식 화가가 되어 자율적으로 활동했다.

Perugino, Madonna and Child, 1501National Gallery of Art in Washington
Perugino, Madonna and Child, 1501National Gallery of Art in Washington

페루지노의 첫 번째 위대한 작품은 현재 런던의 코톨드 예술학교에 소장된 <성모자(Madonna col Bambino)>이다. 이 작품은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풍이며 또한 플랑드르파의 영향력과, 북유럽 및 플랑드르 예술의 접촉점을 시사한다. 당시는 동방박사나 성모 탄생 그리고 눈의 기적으로 규정되는 시기이다. 페루지노의 특징은 형식미와 확고하고 우아한 소묘, 밝은 색감과 풍부한 빛, 세련된 명암의 분배 그리고 숙달된 원근법이다. 이는 모두 르네상스의 시대의 특징들로서 1476년 <동방 박사의 경배(Adorazione dei magi)>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작품은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였는지 보여주며, 인물들의 형태는 매우 뚜렷하지만 스승 델라 프란체스카에 비교해 부드러운 느낌을 지닌다.

Perugino, Madonna with Child (detail)
Perugino, Madonna with Child (detail)

페루지노의 탁월함과 당대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은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La consegna delle chiavi a Pietro)>이다. 이 걸작은 당시 가장 유명한 후원자 중 한 명인 교황 식스토 4세가 자금을 지원했다. 작품에서 화가는 원근법의 창시자인 델라 프란체스카와 같이 관람자의 움직임과 주의를 수평 횡대로 이동시킨다. 작품은 의도적으로 3층으로 구분된 프레스코화로서 하나는 인물 중심의 전경, 다른 하나는 수평 정렬, 마지막은 건축적 배경으로 나뉜다. 멀리 펼쳐진 희미한 풍경 또한 르네상스의 이상적 조화와 고전적 완벽성을 표현한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기의 다른 화가들에 의해 발전되어나갈 모든 특성을 두루 갖추었으며, 페루지노는 새로운 스타일로 고전주의의 형식적 간결함에 도달했다. 깨끗한 구성감과 명확하고 우아한 디자인, 빛으로 가득한 색감은 균형 잡힌 공간미로 표현되었으며, 남녀의 인물들은 지상의 성격을 벗어났다. 1494년 밀라노 공작의 보도원이 묘사했듯이 “매우 달콤한 천상의 분위기”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바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머지않아 로렌조 데 메디치가 파견한 화가들에 의해 묘사되었다는 사실이다.

1483년, 메디치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피렌체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야심찬 계획을 시도한다. 바로 빌라 디 스페달레토(Villa di Spedaletto)의 단장이었는데 이는 볼테라에 있는 메디치가의 여름 별장 중 하나였다. 여기엔 보티첼리와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 그리고 페루지노가 함께했다. 아마도 당시로써 가장 위대한 작품이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훌륭한 신화적 작품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페루지노는 엄청난 유명세와 인기를 누리며, 피렌체와 페루자 두 곳에서 공방을 유지하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고정된 조력자와 일하기보다는 현지에서 직접 조력자를 고용하는 것을 선호했고, 이로써 자신의 스타일과 지역 상황을 조율했다.

많은 곳을 여행했던 그는 특히 베네치아를 돌며 당시 화가들의 작품과 색상을 연구했다. 결혼과 함께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페루지노는 신플라토닉 철학가들의 모임의 일원이 되었고, 메디치가의 황실에서 더욱 큰 명성을 날렸다.

이 시기가 바로 화가로서 가장 높이 평가되었던 때이며, 수많은 화가들을 비롯하여 유명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고전주의로의 귀환을 시도하게 했다. 당대의 왕자들, 통치가들, 귀족들은 그의 작품을 갈망하였고, 작품들은 다음 세기를 위한 열매가 되었다.

어느 날, 그의 공방에 한 젊은이가 화풍을 배우고자 당도하였는데 바로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Raffaello)였다. 라파엘로는 페루지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조화와 침묵, 부드럽고 미묘한 색감, 세심한 원근법, 섬세한 우아함과 달콤한 우울함으로 가득 찬 인물상 그리고 이상적 균형을 배웠다. 페루지노는 진정한 르네상스 시대의 조화와 고전성의 대가였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verisität Berlin, Facilitator at Osho Resort, Poona India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