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향기를 노래하다
[아츠앤컬쳐] 세상에는 여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노래들이 참 많다.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Billie Jean)’을 포함해 닐 다이아몬드의 ‘스윗 캐롤라인(Sweet Caroline)’, 에릭 클랩튼의 ‘레일라(Layla)’, 더 폴리스의 ‘록산느(Roxanne)’ 등이 그것이다. 연모하는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들은 일반적으로 남성 가수들의 전유물로서 인기를 끌어왔다. 팝이나 락은 물론 샹송에서 가요에 이르기까지 남성 가수들의 개성적인 목소리는 많은 여인의 이름을 부르고 각인시켰다. 알제리의 유명 가수인 할레드(Khaled) 역시 ‘아이샤(Aïcha)’란 노래로 아랍 여성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렸다.
‘아이샤’란 이름은 아랍권 내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아마도 아랍인들의 거리에서 ‘아이샤’를 부르면 히잡(hijab)을 쓴 수많은 여인이 고개를 돌릴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레드의 ‘아이샤’는 흔치 않은 느낌을 주는데, 이슬람 특유의 멜리스마 창법과 대중적 팝이 뒤섞인 독특한 라이(raï) 음악이기 때문이다. 할레드는 알제리의 전통음악인 라이를 유럽 문화권에 전파한 가수로서 현재까지도 알제리 최고의 국민가수로 사랑받는다. 그의 음반들은 10개의 다이아몬드, 플래티넘, 골드 인증을 받았으며, 그가 명실상부 가장 유명한 아랍 가수로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 사실 ‘아이샤’를 부를 당시 그는 정권의 탄압으로 프랑스에 망명 중이었지만, 프랑스의 싱어송라이터 장 자크 골드만(Jean-Jacques Goldman)과의 작업을 통해 “라이의 왕”이란 찬사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현재 월드뮤직의 한 장르로 깊게 뿌리내린 라이는 “항구 음악”의 진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나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구에서 태어난 탕고나 파두처럼, 라이 또한 알제리의 오랑 항구에서 탄생했다. 항구 인근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얽히고 섞인 ‘항구 음악’이 그렇듯, 라이도 지역에 거주하던 하층민과 빈곤층의 삶을 대변했다. 고달픔과 외로움, 탄식의 음악인 라이는 ‘생각’ 또는 ‘관점’이란 어원에서 나타나듯 소외 계층과 서민들의 ‘의식’을 포함하며 성장했다. 때문에 초기 라이는 기득권에 대한 불만과 체념으로 유흥과 쾌락에 젖은 노래가 많았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하위문화로 치부되었다. 1960년대 독립 이후 라이는 신정부에 의해 금기시되었는데 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금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정부는 청년음악으로 자리 잡은 라이를 통해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통합을 꾀하고자 했으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보게 되었다. 이때 많은 라이 뮤지션들이 알제리를 떠났고, 할레드 또한 “라이의 왕”이란 타이틀을 뒤로하고 프랑스로 도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알제리 전역의 신세대들을 통해 현대적으로 거듭난 라이는 유럽을 매료시켰다. 독특한 이슬람 창법과 서구의 록과 팝이 결합된 신(新)음악 라이는 개성 넘치는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알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의 라이의 선전은 한 때 알제리의 식민 모국이었던 프랑스에 대한 예술적 승리로도 언급되었다.
1996년 할레드의 세 번째 앨범 <사하라(Sahra)>에 실린 ‘아이샤’는 유럽 시장을 강타했다. 프랑스 음반협회 싱글챠트 1위, 벨기에 싱글챠트 1위를 비롯해 각 유럽 챠트들을 석권하며, 독일과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루마니아로 퍼져 나갔다. 코러스에 꼭 들어맞는 이름과 시바의 여왕을 언급한 가사, 유로 팝에 입혀진 이슬람 창법의 매력은 아랍 여인의 이국적인 매력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할레드의 보컬 능력은 당당하고 그윽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노래에는 미래의 음악 씬을 품을 만한 넉넉한 강인함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라이의 왕” 다운 온건한 미소가 있었다. 그는 ‘아이샤’에서 한 여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가사가 전해주듯 어디서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음악 라이를 칭송하고 있었다.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