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유럽 역사에서 르네상스는 문화와 예술의 시대로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시기적으로는 중세 말부터 근세 초인 14세기 중반에서 16 세기 말로, 그 어원은 1500 년대의 화가이자 예술학자인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에 의해 시작되었다. 의미상 중세의 반대 개념이며 로마 고전주의와 새로운 시대의 사이 즉 1400년을 기점으로 출발한 문화 예술의 재탄생을 뜻한다.
대부분 르네상스는 라파엘로(Rafaelo),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예술의 호황기로 알려졌지만 실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물론 이 시기에 위대한 예술가들이 배출되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암흑기였다. 유럽의 강력한 왕들에게 금전을 빌려주던 피렌체의 메디치(Medici)가를 포함한 은행가 집안들은 일종의 고리대금업자였을 뿐, 당시 이탈리아는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으로부터 지속적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탈리아는 끊임없는 전쟁터였다.
당시 로마와 교황은 부패의 온상이었고, 교황의 부패에 독일식 신념으로 맞선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한편 부와는 거리가 먼 일반 시민들은 세금과 전쟁으로 계속적인 고통에 시달렸으며 위대한 화가나 철학자, 시인 그리고 과학자가 탄생하여 위기의 열매들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진정한 르네상스는 1400~1500년이 아닌 그 2세기 전이다. 이탈리아 문화의 호황기는 1230년에서 1348년까지로, 흑사병이 시작되어 유럽 인구의 50%가 감소된 때이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와 미술가 조토(Giotto) 그리고 그의 학파가 이탈리아 문화를 대표하던 시기였다. 조토로 알려진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전 이탈리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화가였으며 아마도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와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할 수 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하여 유명 화가 치마부에(Cimabue)의 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곧 실력을 인정받아 유명해진 그는 교황이 보낸 전령들 앞에서 컴퍼스를 사용하지 않은 채 완벽한 원(Giotto’s ‘O’)을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당시 교황은 자신의 초상화를 위탁할 화가를 찾고 있었는데, 조토는 이미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Chiesa di Santa Maria Novella)의 <십자가 순교(Crocifisso)>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에게 찾아온 전령들은 작품에 대해 물었고 그는 <십자가 순교>를 가장 좋은 작품이라 소개했다. 그러자 전령들은 “오직 그것뿐이냐”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했고 조토는 그 자리에서 간단히 종이 위에 완벽한 원을 그려 보였다. 결국 그의 원은 로마로 보내졌고 그의 뛰어난 천재성을 알아본 교황은 그를 로마로 초대했다.
조토는 로마에서 교황을 위해서뿐만아니라 피렌체, 파도바, 나폴리, 아씨시 등에서 오늘날까지도 각광받는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의 그림에서 모든 자연적 환경이 표현된 장면들은 강한 색채의 변화로 주어진 가소성이 특징이며, 신성한 주제에서조차 놀라운 표현력을 보인다. 그의 스타일은 다른 화가들의 손을 거쳐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 회화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학파 또한 아시시의 타데오 가디(Taddeo Gaddi)나 푸치오 카판나(Puccio Capanna) 등 화풍을 전수받은 제자들로 인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조토의 시대에는 탁월한 학파들이 줄을 지어 일어났는데 볼로냐 근처의 리미니 학파 또는 스폴레토의 움브리아 학파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 위대한 수학 천재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가 있었다. 또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조각가 중 하나인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는 조각품들을 날씬하고 우아한 곡선형으로 만들면서도 강렬한 움직임과 명확성을 보여주었으며 놀라운 표현력으로 이탈리아 특유의 풍부함을 잊지 않았다.
피사노는 14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특히 피사와 시에나 등 당대 가장 중요한 건설 현장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시에나 대성당(Duomo di Siena)의 입구와 같이 유연함과 표현력, 공간 안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건축을 넘어선 예술성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갱신하였으며 진정한 혁명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문화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와 같은 대도시의 유산을 넘어,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균등하고 대등한 문화적 부를 창출하며 확산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개화기가 가져온 소도시들의 발전과 부흥은 이후 이탈리아의 두번째 르네상스를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1200년대 ~1300년대 화가들과 예술가들은 이름난 문화 지역들을 방문하며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연구 개발하여 회화와 스타일의 혁신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이전의 정적 회화는 생동감을 입었으며 그 중심에 자리하던 조토는 유럽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다.
사실상 유럽 회화는 조토로 인해 역사를 다시 썼으며 3차원적 그림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스크로벤니 성당(Cappella degli Scrovegni)의 벽화 <최후의 심판(Giudizio Universale)>은 이탈리아와 유럽의 저명한 르네상스 화가들이 견학하여 연구했을 뿐 아니라, 미켈란젤로를 포함하여 ‘심판’에 대한 그림을 그린 모든 화가들의 전형이 되었다.
한 예로 조토의 섬세한 디테일은 200년 후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에서 발견되는데 서로에게 내민 두 손이 바로 그것이다. 조토의 풍경들은 비현실적이지만 암시적이며 자연주의적이 아니라 상징적이다. 그의 벽화 속 형상들은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하던 제스처와 행동이 담긴 ‘몸짓의 언어’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형태들은 모호함을 벗어나 마치 살아있는듯 감정을 표현했으며 눈동자는 영혼의 느낌을 전달했고 더불어 형상들은 인물로서 서로 소통하며 이야기했다. 그와 함께 시작된 그림의 언어적 혁명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 조토 이후 회화는 그 어느 것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 위대한 문화적 혁명은 1348년 흑사병과 함께 종식된 듯 보였다. 수백만의유럽인들의 죽음으로 모든 것은 갑자기 사라지고 느려졌다. 그러다가 곧 다시 천천히 삶이 재개되었으며 모든 것이 중단된 바로 그 곳에서 새로운 르네상스가 꽃피웠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가 위대한 예술을 창조했으며 비범한 건축가들이 점점 더 아름다운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전의 첫 번째 르네상스 덕분에 가능했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verisität Berlin, Manager at Osho Resort, Poona In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