쟘바티스타 티에폴로(Giambattista Tiepolo)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후기 바로크 이후 로코코 시대의 주요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기념비적 장식품의 달인이었다. 1696년 말 베네치아의 부유한 선주(船主)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르네상스 거장들의 뒤를 잇는 뛰어난 화가였다.
가문의 유업을 물려받는 대신 그는 자신의 성향을 따라 1710년, 14세의 나이로 역사적 화가 그레고리오 라자리니(Gregorio Lazzarini)의 로코코 공방으로 들어갔다. 라자리니의 가르침은 여러 그림 기법과 디자인뿐 아니라 타 화가들의 작풍 조사와 고객 응대, 새로운 주제에 대한 씨름, 고대와 동시대 화가들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포괄적이었다.
1715년경 그는 조반니 일 코르나로(Giovanni II Cornaro) 총독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으며, 1717년 궁전의 다양한 장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훈련된 티에폴로는 라자리니의 공방을 떠나 예술적 경력을 시작하였고, 엄청난 생산 능력을 보이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그의 경력은 끊임없고 총체적인 작업의 산물이었으며, 작품들 또한유럽 전역에서 수요가 많았다.
티에폴로는 매우 다재다능했으며 자신이 일하던 도시의 스타일과 트렌드에 자신의 예술을 적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 덕분에 18세기 초 시들했던 베네치아 장식의 전통이 다시 유럽 전역에서 재조명받았다. 티에폴로는 무엇보다 작품들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베네치아의 카르미네 학교(Scuola del Carmine)의 유화들과 우디네의 대주교 궁전(Palazzo Arcivescovile)의 프레스코화들을 작업했다. 베네치아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유화로, 당시의 그늘지고 극적인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대단히 어두운 색조를 보였다.
우디네에서 3년간 일한 후 성공의 문이 열리자 다양한 이탈리아 도시들, 특히 밀라노, 베르가모, 비첸자와 유럽 지역들에서 작업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1750년, 독일의 특별한 후원자인 뷔르츠부르크의 카를 필립폰 그라이펜클라우(Karl Philipp von Greiffenclau zu Vollrads) 주교는 그에게 자신의 거주지에서 그림을 제작해주기를 요청했다.
아들인 쟌도메니코(Giandomenico)와 로렌초(Lorenzo)의 도움으로 티에폴로는 많은 비평가들이 최고의 장식품으로 인정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피로연장의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싸의 이야기(Stories of Frederick Barbarossa)와 웅장한 계단에 자리한 네 면의 세계에 둘러싸인 올림푸스(Olimpoattorniato dalle quattro parti del mondo)가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바로크 양식의 고전적 형태를 넘어 뚜렷한 환상으로 현실과의 분리를 나타내는데, 이 때문에 유럽 내의 그의 명성은 절대적이 되었다.
1753년경 베네치아로 돌아온 티에폴로는 수많은 의뢰를 받게 되었고, 그의 스타일을 확정지은 일련의 작품들을 그리게 된다. 비첸차 근처의 빌라 발마라나(Villa Valmarana)의 프레스코화들과 팔라초 두칼레(Palazzo Ducale) 및 몇몇 귀족 가문들을 위해 그린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1762년 티에폴로는 카를 3세의 부름으로 스페인 마드리드로 이사하여 새로운 왕궁의 방에 프레스코화와 여러 장식들을 작업한다. 이 시기, 그의 아들들과 함께 홀과 천장 세 면에 그린 그림들은 회화의 역사상 절대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이다.
쟘바티스타 티에폴로는 매우 빠른 회화 방식과 밝기를 부여하는 기법의 선호로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탈리아나 유럽의 성당과 별장, 궁전에서 다양한 고객을 위해 만들어진 그의 기념비적 장면들은 천장과 벽을 허무는 공간적 능력을 보여준다. 티에폴로는 후원자들을 위해 바로크적 영감이 재해석된 신화적인 인물들로 환상적, 장식적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이러한 장르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회화와 드로잉, 에칭화, 판화 등 베네치아 회화를 재조명하게 만든 티에폴로의 예술에는 많은 이면이 존재한다.
그의 그림들은 바로크 양식의 파토스 및 극적 성격에서 자유로워졌고, 그림 속의 추상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차원은 인물들의 몸짓과 부드러운 시선이 서로 상호작용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화려한 빛의 존재로 균일해지며, 특징을 담아내는 섬세한 팔레트를 통해 유연성과 조화로 등장인물들을 구성한다. 프레스코화의 중앙 부분은 거의 항상 맑고 빛나는 하늘과 푸른빛의 열린 공간으로, 우아한 숙녀와 천사, 영웅 및 성인이 자리하는 흰 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화려함을 좋아하던 그는 풍성한 옷차림을 한 인물들을 표현하며, 호화로운 디테일과 색상 및 공간에 주의를 기울였다.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기술로 그의 인물들은 마치 무거운 휘장과 함께 공중에 떠서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다수의 장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세심하게 연구되었고, 대단한 통찰력과 천재성으로 신화적, 종교적, 우화적으로 표현되었다.
놀라운 극성(劇性), 우아한 스타일, 엄청난 조형미, 어떠한 관례에서도 그는 매우 민첩하고 자유로웠기에 진정 마지막 장식가로 불렸다. 이러한 자질들 때문에 스페인 왕은 그를 자신의 황실로 불렀으며, 티에폴로는 마지못해 의뢰를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베네치아와 스페인 외교부가 그를 설득하려 개입하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관료의 의전과 왕의 의사 결정 등 초과 근무로 많은 왕실 업무들을 수행했다. 이는 그가 개인적인 중개료를 받을 방법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770년 3월 27일, 티에폴로는 마드리드에서 갑자기 사망하여 산 마르틴(San Martin) 성당에 묻혔지만, 성당은 이내 파괴되었다. 곧 유럽에서는 신고전주의라는 새로운 유행이 시작되었지만, 그의 명성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후세에 찬사를 남겨두고 떠났으며, 르네상스의 정형성을 극복한 그로 인해 프레스코화의 섬세한 공간 효과가 창조되었다. 중앙 부분이 하늘로 펼쳐진 천장 사이로 자연스럽게 떠다니는 가벼운 인물들과 함께 그는 회화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면 화가였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verisität Berlin Facilitator at Osho Resort, Poona In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