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2024년이 무슨 띠인가 봤더니 용띠해다. 지인들 가운데 용띠들이 유독 많다. 게다가 모두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들이라 존재감이 커서 그런지 눈에 띄는 것 같기도 하다. 2년에 한 번씩 유럽의 오페라 극장을 찾는 여행을 기획해 다녀오는데 13년 동안 같이 했던 해외여행 중에는 거의 비가 오질 않았다. 농담처럼 용띠 회원들의 숫자가 많고 워낙 기가 세서 그렇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존감이 강한 분들이다. 그분들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문제 해결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인데 그 성격은 과연 타고나는 건지 아니면 학습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한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들의 성격이 모두 다른 걸 보면 타고나는 유전자의 다양성에 더 무게를 두는 의견에 더욱 귀가 솔깃하다. 한마디로 타고나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동양에서 용은 왕의 상징이다. 뱀으로 자란 이무기가 때를 맞아 탈피해 결국 용으로 승천하는 모습에서 전투 레벨 최상위의 왕을 상징하기에 적당해서 그런지 중국이나 한국 드라마 속에서 왕들의 의복에 새겨진 용무늬를 역사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전설 속에 등장하는 단편적인 모습 정도로 등장할 뿐 호랑이나 여우보다도 현대의 콘텐츠에 잘 등장하지 않았는데 한국도 중국도 아닌 일본에서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 볼’에 용이 등장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드래곤 볼을 모두 모으면 용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데 램프의 요정 지니의 능력을 지닌 모습으로 등장해 죽은 사람도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만화는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되어 3억5천만 부라는 어마어마한 메가 히트작 반열에 올랐고 강제 은퇴 불가한 작가로서 종신 계약된 건지 계속 시리즈를 만들다 나중에는 좀 황당한 수준의 설정으로 만들어져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영화, TV 시리즈로 다시 생산되었다. 만화의 제작은 일본이 했지만, 중국의 손오공 캐릭터를 가져와 사용하였고 매화마다 독자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이야기 전개로 전 세계 독자들을 열광하게 했다. 필자의 고등학생 시절 해적판 만화책도 많이 돌아다녔고 학교 앞 문방구라고 불리던 잡화점에 줄을 서서 책을 기다리던 추억이 있다.
미래학자들이 주장하던 콘텐츠의 시대에 부흥하는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로 인해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장면들을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전설의 콘텐츠화가 가속되었다. 사실 유럽의 르네상스 시절부터 그리스의 신화를 무대 위에 구현해 내고 싶어 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오페라가 태어났지만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진정 스펙타클한 장면들은 했다 치고 두루뭉술 넘기거나 흉내만 내는 정도였다.
이런 상상력의 현실화는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그 정점에 2001년 개봉한 판타지 영화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보면서 원작자가 궁금했다. 이런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했더니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던 톨킨에 의해 1954년 쓰인 소설이 2001년에 들어서 그 상상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비공식적으로 톨킨의 소설에 영향을 준 오페라 공연이 있는데 독일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의 작품이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력이 발전하면서 무대 장치 역시 엄청난 발전을 거두게 되는데 그에 발맞춰 바그너가 만든 전설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을 현실화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바그너가 만든 오페라 반지 시리즈는 공연 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지금까지도 바그너 마니아들을 생산해 나가고 있는데 니벨룽엔 반지 시리즈 중 3부 [지크프리트] 편에서 라인의 황금으로 만든 투구와 반지를 소유한 거인 파프너가 용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때 들고 간 칼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2부 [발뤼레]에서 보탄(오딘)이 나무에 꽂아놓고 그 누구도 뺄 수 없었던 칼을 오딘의 바람으로 만들어진 아들인 지그문트가 뽑게 되는데 보탄은 부인 프리케의 질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두 동강 내버린 칼 ‘노퉁’을 지그문트의 아들 지크프리트가 다시 붙여서 용을 죽이기 위해 찾아간다.
지크프리트는 결국 용을 죽이는데 그 과정에서 손에 튄 용의 뜨거운 피를 본능적으로 먹어버리자 새가 하는 말까지 알아듣게 되면서 모든 생물의 말을 알아들을 것은 물론 타인의 속마음까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게다가 용의 피에 목욕한 이후에는 방탄의 몸을 갖게 되면서 어마어마한 전투 능력의 소유자가 된다. 보너스로 언덕 위에는 불의 장막 뒤에 숨겨진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새로부터 전해 듣고는 불구덩이를 뚫고 달콤한 입맞춤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운명의 그녀는 지크프리트가 태어날 수 있도록 지크프리트의 어머니를 보탄(오딘)으로부터 도망가도록 주었던 발키리 여전사 브룬휠데였다.
대충 들어봐도 여러 신화와 동화를 종합 선물 세트처럼 구겨 넣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건 필자뿐 아닐 것이다. 세상을 소유할 수 있는 절대 반지와 황금 투구의 힘으로 변신한 용을 무찌르고 지크프리트는 반지와 투구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하지만 그 반지에는 저주가 걸려있었는데 반지의 소유자는 신이건 인간이건 거인이건 명을 재촉하는 죽음의 저주였다. 신마저도 죽음으로 이끄는 반지지만 절대권력에 끌리는 나약한 존재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계기로 4부 [신들의 황혼]의 빌드업이 완성된다. 과연 무적의 몸을 소유하고 타인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게 된 무적의 지크프리트에게 죽음의 저주는 과연 작동할 것인가?
1부 [라인의 황금]부터 쭉 오페라를 보지 못하면 중간 이야기를 절대 이해할 수 없기에 바그너 애호가라면 바그너가 세운 바이로이트 극장에 가서 1부에서 4부까지 모조리 다 봐야 한다는 사서 고생해야 하는 매우 힘든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3부 지크프리트는 4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황금을 사랑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만든 오페라지만 제작자인 바그너조차도 고리대금 업자에게 쫓겨 여러 나라를 전전하고 이리저리 돈을 빌리고 다녔다. 그 누구도 황금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리를 본인 스스로 실천한 위인이 바로 바그너인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바그너의 교훈에 따라 올해는 욕심을 조금 줄여보는 것은 어떨까?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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