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예술가 후원은 대한민국에서 요즘 꽤 뜨거운 개념이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지는 오래된 것 같은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예술가에겐 가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만큼 화려한 예술계에서의 성공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그것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1등이 아니면 굶는다며 음대로의 진학을 극구 말리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시간이 지나고 더 뼈저리게 느껴지곤 했었다.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직업 음악가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물론 동네의 음유시인이라는 전설의 타이틀이 남아있지만, 부업 정도였고 르네상스 시대 오페라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오페라라는 대박 콘텐츠가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하면 뛰어난 음악가들을 지인으로 주변에 두는 것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되기 시작했다. 요즘 유명 연예인의 친필 사인이라도 갖고 싶어 하는 문화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르네상스의 문화적 혁신이 기독교 문화에서의 절대적 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예술의 발전은 상업과 무역의 발전을 통해 쌓은 부를 표출하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였다. 남과의 비교를 허용할 수 없었던 유명 가문들 간의 쩐의 전쟁은 좀 더 뛰어난 예술가들의 확보가 필수였는데 도시 한가운데 거대한 교회당 내부에 가문을 위한 납골당의 위치와 투자는 경쟁 가문들보다 더 앞선 디자인, 더 유명한 예술가의 조각 작품들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교회들도 자연스럽게 부유해졌고 글을 읽을 수 없던 대중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그린 그림들과 조각상들로 교회의 건물 이곳저곳에 장식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돈이 있어도 만들기 어려운 멋진 건축물이 되었다.
미술 사조의 변화가 시작되면 바로 음악도 그 변화를 따라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작은 장소에서 음악을 나누고 발전시키던 카메라타 그룹에서 시작된 극과 음악의 결합 실험, 메디치 가문의 결혼식에서 시작된 오페라, 후일 귀족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오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베니스에 최초의 공공극장이 들어서면서 귀족은 물론 돈 많은 상인들과 일반인들도 티켓만 사면 오페라를 볼 수 있게 되었고, 극장 비즈니스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큰 극장들이 돈 많은 귀족과 상인들의 투자로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쇼비즈니스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때부터 귀족에게 종속되어 있던 음악가들은 서서히 독립을 시작한다. 누구에게 얽매이지 않더라도 대중 공연장에서 공연을 올리고 먹고 살 수 있는 사회 환경이 조성되면서 프리랜서 음악가들이 등장하는데, 유명 작곡가 중 모차르트가 그 자유분방함을 주체하지 못해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 끝에 잘츠부르크를 벗어나 비엔나로 활동지를 옮긴다. 아쉽게도 모차르트는 아티스트답게 경제 관념이 없어서 결국 돈을 별로 모으지도 못했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이후 음악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베토벤은 여러 후원자들로부터 돌아가며 후원을 받았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는 명성 때문에 유럽 어디를 가든지 출신성분으로 상류 계층과 쉽게 교류가 가능했다. 괴테는 어마어마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길에서 귀부인들에게 먼저 인사를 했는데. 베토벤은 거만하기 짝이 없어 귀부인들이 먼저 인사하기 전까지는 목에 깁스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귀족 부인들의 피아노 개인지도 선생이었고 귀족들의 작곡 선생님으로 활동했으니 자연스럽게 귀족의 지원을 당당하게 받을 수 있었다. 베토벤에 열광하던 비엔나 귀족들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는데,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작, 라주모브스키 백작,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슈비텐 남작, 로브코비츠 공작, 파스콸라티 남작, 브라운 백작, 프리스 백작, 발트슈타인 백작, 로브코비츠 공작, 라주모프스키 백작, 프리스 백작 등이 있다. 심지어 킨스키 공작과 로브코비츠 공작이 사망하고 나서도 그들의 부인들은 베토벤에게 남편이 약속한 금액을 오랫동안 지원했다고 하니 참 다양하고 충성스러운 후원자들을 거느렸던 인물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열두 제자와 비슷한 느낌이라서 음악의 성인으로 불리는 건 아닐까?
리히노브스키 공작과 관계가 틀어졌을 때 심지어 “공작님은 우연히 그 위치로 태어난 거지만 난 나의 능력으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귀족은 수천 명이지만 베토벤은 단 한 명뿐입니다.”라고 말했다니 정말 어마어마한 자존심의 소유자였다. 어디 가서 딱 굶어 죽기 쉬운 성격이었으나 그는 음악의 힘으로 후원자들을 무릎을 꿇게 만든 사람이었다.
이런 베토벤의 당당함을 넘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뻔뻔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바그너라는 독일 작곡자다. 말년에 만난 바그너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에게 지금도 바그너 페스티벌로 유명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지어줄 정도였다.
왕을 만나기전에 바그너는 아이러니하게도 1849년의 드레스덴 혁명에서 궁정 지휘자임에도 불구하고 혁명 시위대 측에 서서 정부군에게 저항하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이후 13년간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던 지경이었다. 그중 9년을 스위스 취리히에서 보냈는데 그때 오토 베젠동크 라는 재력가를 만나 후원받게 되었고 무료로 거처까지 해결했다.
이때 4부까지 만들 예정이었던 역작 ‘링 시리즈’ 중 작품의 1, 2부까지 잘 만들어놓고는 다 멈추고 갑자기 불륜 러브스토리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했다. 왜 그랬냐 하면? 후원자 ‘베젠동크’의 아내와 바람이 났기 때문이다. 불륜의 결과가 역사적인 작품의 탄생이라니, 감사해야 할지 비난해야 할지 이 세상의 잣대로 평가하기 힘든 인물이 되어버렸다. 돈을 빌려 떼먹고 야반도주하는 건 일상이었고, 무려 친구였던 지휘자 한스폰 뷜로의 아내 코지마를 그것도 애까지 있는 유부녀인데 이혼시키고 결혼까지 해 버렸으니 세간의 비난 같은 건 그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뻔뻔한 캐릭터와 정반대도 있었는데 차이콥스키였다. 그는 워낙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대인관계가 좁았다. 한 예로 기다림에 지친 약혼녀는 다른 남자에게 도망가 버리고 결국 9살 연하의 여제자의 적극적인 구애에 마지못해 결혼했지만 세상의 불행은 혼자 안고 살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망쳐버릴 정도로 갈등 회피형 인간이었다.
이런 성격의 차이콥스키에게도 재정적 후원자가 있었는데 폰메크 부인이라는 귀부인이었다. 악보 출판비 지원을 시작으로 매년 육천 루블씩 지원했고 서로 편지도 자주 보내고 받았다. 이 정도면 만나서 뭔가 스캔들이 있었을 만한데도 정말 한 번도 차 한 잔 같이 마신 적 없는 사이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다 마주쳤는데 서로 모르는 척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혈액형으로 따지면 트리플A 형이거나 요즘 MBTI식으로 따지면 ENFP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예술가와 후원자의 유형은 혈액형이나 MBTI 만큼 참 다양하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메세나 협회와 같은 공공사업의 형태로 기업과 예술가를 이어주는 형식의 제도들이 운용되고 있지만 후원금의 지원은 개인의 삶보다는 공연의 제작에 지원된다. 무대에 서기만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기획을 해서 무대를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리스크가 있어서 마치 자영업자처럼 잘못하면 공연 제작하다 재정적 수렁에 빠질 수도 있어 녹록지 않다.
예술가들의 생활은 대부분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양극화되어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서지 못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많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내기는 더 어렵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데 예술가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무대라는 언덕이 많은 예술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더 많이 만들어져서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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