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일 듯, 빈 마음을 채우는 소소한 붓질의 향연
[아츠앤컬쳐] 오색 단풍이 넘실넘실 춤추듯 전체 화면이 일렁인다. 보고만 있어도 콧노래가 흥얼거린다. 비음을 타고 나오는 마음속의 노래는 어느새 온몸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있다. 큼직한 붓 터치가 율동감 자아내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붓 터치들이 합쳐진 하모니이다. 일정한 방향으로 결을 맞춰 전진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음률의 비늘처럼 제 자리에서 진동하는 것도 있다. 함명수의 그림은 특정한 형상이 없음에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흡입력을 발산한다. 오로지 향기에 이끌려 저 멀리에서 꼬인 나비나 꿀벌이 된 느낌이다.
함명수 작가가 아주 간만에 청담동의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BLOW>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갖고 있다.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입김이나 바람이 불어 잔잔하게 흔들리는 감흥을 전한다. 한껏 자유로워진 붓 터치로 텅 빈 마음을 바람으로 채워주는 그림 같다. 색채의 울림과 리듬감 넘치는 특유의 에너지가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다. 1993년 첫 개인전 이후 함 작가의 주요 관심사는 ‘살아있는 감각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였다. 흔히 ‘면발 풍경’으로 불리는 그의 풍경 시리즈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유화와 아크릴 물감을 넘나들며 특유의 감각적인 붓질로 생성과 소멸의 물리적 과정을 감성적 관점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그의 캔버스는 생명감으로 충만한 것을 담아낼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것들에서 집착의 무게, 덧없는 야망의 납덩어리를 떼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힘이다. 마음을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워낸 시선에만 들어오는 그런 바람결의 풍경에 이르러보자. 터치들은 그런 지향을 스스로 증명해 내기라도 하듯 정방형의 공간을 자랑스럽게 횡단한다. 경쾌하지만 피상적이지 않은 비행들이 살아있음의 조율된 감흥을 빗어낸다. 색은 색과 터치 사이의 중간쯤에서 소란스럽지 않게 꿈틀댄다. 형형색색의 운동들이 모두 제각각 유희하면서도, 하나의 커다란 일체감을 이루어낸다. 이 바람결의 풍경은 신선하고 아름답다.”
미술평론가 심상용의 함명수 작품에 대한 해석이다. 이 말처럼 함명수의 그림은 ‘회화의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분명 추상의 언어로 노래하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 또렷한 단어와 문장으로 귀에 쏙쏙 꽂히는 것과 같다. 텅 빈 마음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속삭임의 울림은 ‘살아있음의 감각’으로 보는 이를 위로해 준다. 함 작가 역시 “지난 30여 년간 오로지 회화적 언어에 집중했던 노력이 이제야 결실이 되어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대상에 심취하고 몰입해 쉼 없이 관찰하며, 사유와 관념의 창의적 표현에 천착하는 과정을 거친 후의 성과이기에 더욱 값지게 여겨질 것이다.
함명수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한 관점에서 회화를 재발견하고 있는 점이다. 이야기가 담긴 풍경, 상징성을 지닌 정물이나 소품, 감성적 감흥을 자아내는 조형적 실험 등 풍부한 조형적 실험은 시즌마다 제각각의 성과를 보여줬다. 하지만 정작 마음 한편으로 미비하게 느낀 점은 ‘시각적인 형상성마저 배제한 경지에서의 회화성 표현’이었다. 순수한 붓 터치의 흐름만으로 풍부한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회화적 조형어법 찾기에 매진했다. 바로 이번 신작 발표가 소기의 결산인 셈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옹알이가 가장 순수한 언어이듯, 온전히 붓 터치의 흐름만으로 새로운 교감과 공감의 경계를 넘게 된 함명수의 ‘BLOW’ 시리즈를 주목하게 된다.
함명수(1966~) 작가는 목원대학교 회화과와 동국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호리아트스페이스 & 아이프라운지, 조선일보미술관, 갤러리현대 윈도우갤러리, 사비나미술관, 이화익갤러리 등에서 17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Art Pick 30(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23), 윤동주가 사랑한 한글(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주, 2023), 화랑미술제(코엑스, 서울, 2023), 아트 파리 아트페어(그랑팔레, 파리, 프랑스, 2023,24), 강원작가트리엔날레(평창, 2022), 주헝가리 한국문화원 개원 10주년 특별전(부다페스트, 헝가리, 2021), 뜻밖의 발견, 세린디피티(사비나미술관, 서울, 2020), 유유산수 - 서울을 노닐다(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서울, 2018), 전환의 봄, 그 이후(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18) 등 120회 이상의 기획단체전에 참여했다. 또한 프랑스 파리 시떼 예술 공동체 레지던시 프로그램(2015)에 초대되어 참여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홍천미술관, 하나은행 등 기관 및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글 | 김윤섭
명지대 미술사 박사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예술나눔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 이사장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