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장 ‘라 마에스트란사’를 마주보는 카르멘 동상
투우장 ‘라 마에스트란사’를 마주보는 카르멘 동상

 

[아츠앤컬쳐]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수도 세비야(Sevilla)는 <카르멘>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세비야에는 과달키비르강이 시가지를 동서로 가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강은 과달키비르강의 주류가 아니고 이와 연결된 운하다. 그래서인지 그 수면은 고요하고 잔잔하다. 오늘날 이 강에는 유람선이 가끔 지나가고 있지만 옛날에는 수많은 상선들로 넘쳐났다.

1492년에 신세계가 발견된 다음 세비야는 몇 세기 동안 해상무역의 중심이 되었는데, 특히 스페인 함대는 신세계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일 년에 두 번씩 세비야에 입항했다. 당시 세비야는 스페인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고, 아울러 엄청난 부를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성당을 세웠다. 또 18세기에는 쿠바에서 생산되어 이곳으로 운송된 입담배를 가공하고 전 유럽에 판매하기 위해 왕립 담배공장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당시 단일 산업용 건축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세비야 시가지는 과달키비르강을 중심으로 동서 두 지역으로 나뉜다. 동쪽은 대성당이 있는 세비야의 중심이고 서쪽은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트리아나(Triana) 지역이다. 트리아나 지역은 전통적으로 선원들, 도자기공, 건설 노동자, 투우사, 무용수, 집시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만약 카르멘이 실제 인물이었더라면 그녀도 틀림없이 이 지역에 살았을 것이다.

카르멘 동상
카르멘 동상

강 동쪽에는 왕립 담배공장 건물과 마주치게 된다. 담배생산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었기 때문에 만 명 이상의 여직공들이 이곳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일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고고학자였던 메리메(1803~1870)는 이곳에서 일하는 집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카르멘>을 1845년에 발표했다. 30년 후 프랑스의 대본작가 알레비는 이것을 새롭게 각색했고 비제(1838~1875)는 오페라화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두 사람의 사회적 신분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돈 호세는 ‘돈(don)’이라는 경칭이 붙어있으니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지만 카르멘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집시다. 집시는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최하 계급에 속한다. 원작에는 돈 호세의 약혼녀 미카엘라와 투우사 에스카미요는 없지만 이 두 사람은 각각 카르멘과 돈 호세와 대비되는 인물로 오페라를 극적으로 이끌어간다.

세비야 대학. 이 건물은 원래 왕립 담배공장이었다.
세비야 대학. 이 건물은 원래 왕립 담배공장이었다.

한편 왕립 담배공장과 비슷한 시기에 투우장 ‘라 마에스트란사(La Maestranza)’가 강변에 세워졌다. 하얀 벽에 황갈색으로 문의 테두리를 말끔하게 칠한 이 투우장은 12,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투우장을 마주하는 곳에는 카르멘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오페라 <카르멘>의 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투우사 에스카미요가 등장하는 투우 경기가 개최되는 날, 투우장으로 들어가려던 카르멘과 마주친 돈 호세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사랑을 간절히 호소하지만 차갑게 거절당하자 그 자리에서 그녀를 찌르고는 절규한다.

그런데 메리메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오페라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즉, 돈 호세는 북쪽 산악지방 나바라 사람으로 스페인의 비주류에 속하는 바스크족이고, 카르멘은 한 때 나바라에서도 산 적이 있기 때문에 바스크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돈 호세는 고향에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남부 도시 세비야로 피신 왔다가 왕립담배공장을 지키는 부대에 입대했는데 고향의 언어인 바스크어가 끈끈한 연결고리가 되어 마치 숙명처럼 카르멘에게 쉽게 빨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끝까지 맹목적으로 집착하다가 결국에는 파멸을 맞고 말았다.

한편, 만약 <카르멘>의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바꾸어 다시 쓴다면 카르멘은 담배공장 여공이 아니라 여대생이 되지 않을까? 왕립 담배공장 건물이 1954년 이래로 세비야 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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