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트 강 다리 위에서 보는 취리히 시가지
리마트 강 다리 위에서 보는 취리히 시가지

취리히

[아츠앤컬쳐] 취리히는 스위스 최대 도시로 현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곳이지만 예술, 종교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리마트강 다리 위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취리히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두 개의 종탑을 가진 그로스뮌스터 대성당과 강 건너 청록색 첨탑이 있는 프라우뮌스터 교회는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망명 온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반문명, 반합리주의를 표방한 예술사조의 하나로 초현실주의의 뿌리가 된 다다이즘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로뎅 '지옥의 문'이 있는 미술관 본관
로뎅 '지옥의 문'이 있는 미술관 본관

취리히미술관

취리히미술관은 스위스 미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기 위해 1812년에 작은 미술관으로 시작하여 건축가 카를 모저가 설계하여 1910년에 문을 열었다. 여러 번의 확장 공사를 통해 오늘날의 모저빌딩이 완성(1985년)되었고 길 건너편에 건축가 치퍼필드에 의해서 설계된 새로운 건물이 2021년에 문을 열었다. 스위스에서 규모 면에서 가장 크다. 중세부터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주요 화가들은 물론 현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스위스에서 손꼽히는 미술관 중 하나다. 스위스 화가들의 작품, 그중 자코메티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코메티 '전차'
자코메티 '전차'

여행자로서 규모가 큰 미술관을 갈 때는 그때의 상황에 맞게 보고 싶은 작품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제한된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감상하기 위함이다. 나에겐 이곳의 최우선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이다.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취리히미술관의 소개를 자코메티의 작품 감상으로 대신할까 한다.

자코메티 '숟가락 여인'
자코메티 '숟가락 여인'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관

지면으로만 보았던 초기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숟가락 여인>, 자코미티 경력에 눈부신 발전을 이루던 시기의 <전차>의 실물이 주는 감동에 잠시 가슴이 뜨거워진다. 크고 작은 ‘그’만의 정서와 분위기를 담은 조각, 회화, 데생들까지 온통 그의 영혼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그중 청동에 금색을 입힌 높은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바늘같이 가녀린 네 명의 여인상은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가늘고 보잘것없는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존재감은 무엇보다 강렬하고 여운이 남는다.

자코메티관에 전시된 프란시스 베이컨 회화
자코메티관에 전시된 프란시스 베이컨 회화

무심코 한쪽 벽면에 시선이 꽂힌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다. 이 전시관에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자코메티의 것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그중 베이컨과의 조합은 매우 인상적이다.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의 작품이 같은 공간에서 동거하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감성을 불러온다. 그들은 참전은 않았지만 전쟁이라는 시대적 불행을 겪었다. 거기다 각자의 삶과 경험을 더하여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고통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행한 시대의 녹록지 않은 삶을 그들만의 예술로 승화시킨 열정에 숙

자코메티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네 여인'
자코메티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네 여인'

스위스 여행은 빼어난 산세와 끝없이 펼쳐진 호수, 운 좋게 비라도 내리면 거대한 수묵화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비 갠 후 산허리를 따라 움직이는 스네이크 구름은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어느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인간의 능력과 열정은 끼어들 공간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나는 미술관은 대자연 앞에서 작아진 인간의 존재감을 새삼 일깨워준다.

‘고귀한 명성’이란 의미의 “알베르토”, 그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다 떠났다. 하지만 미술관에서의 자코메티는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글·사진 ㅣ 이경희

세계 미술관 여행 작가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