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은가?’ 솔직히 영원히...까지는 모르겠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퀄리티다. 외롭지 않고 건강하면서 적당히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면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육체를 버리고 컴퓨터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결코 가벼운 질문이 아니다. <블랙미러> 시즌3의 네 번째 에피소드 <샌주니페로>는 이에 대한 하나의 흥미로운, 그리고 희망적인 가설이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활발히 진행되는 연구 주제가 바로 영생이다. 이 연구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유전자 개선 등을 통해 신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 둘째는 신체의 일부분을 인공 장기 등으로 대체하는 것, 마지막은 인간의 뇌와 동일한 구조를 가진 컴퓨터 속으로 의식을 이전시키는 것이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향후 10년 내로 인간의 뇌를 소프트웨어로 모델화하는 것이 가능하며, 30년 후에는 인류 대부분이 상시적으로 VR(가상현실) 공간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세상은 <매트릭스> 등 공상과학 영화에서 많이 보았다. 하지만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이고, 실제 가능할 것이라고 납득하기 어렵다. 설사 인간의 뇌를 컴퓨터 속에 모델화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육체의 삶을 버리고 가상현실 속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을지 모르겠다. 육체를 버리고 컴퓨터 속으로 의식을 옮긴다면 그 상태를 과연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샌주니페로>로 돌아가자. 이 작품은 1987년 미국 바닷가의 한 도시 ‘샌 주니페로’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80년대 히트곡이 흘러나오는 클럽에서 수줍고 연애 경험이 없는 젊은 여성 요키(맥켄지 데이비스)는 자신감 넘치고 매력적인 흑인 여성 켈리(구구 음바타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가 어딘가 이상하다. 그들의 만남은 1주일에 한 번씩이며 자정 전까지의 남은 시간을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실은 이 공간 ‘샌 주니페로’는 가상현실이다. 커즈와일이 예견한 것처럼 가상현실이 완벽히 구현되는 미래, 노인들에게 매주 5시간의 가상현실 사용 기회가 주어진다. 이 5시간은 켈리 같은 이들에게는 다시 젊음을 즐기는 일탈의 시간이지만, 요키 같은 이들에게는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 체험 기회이다. 요키는 21살 때 커밍아웃을 하지만 극심한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가족들과의 싸움 후 차를 몰고 나와 곧바로 사고가 나서 40년 넘게 전신 마비로 살고있는 그녀에게는 샌 주니페로가 진짜 삶이다. 이제 그녀는 육체를 안락사시킨 후 샌 주니페로로 완전히 이주하려 한다.
요키의 관점에서 앞서 던진 컴퓨터 속 영생의 기회를 다시 생각해보자. 갑자기 육신에서 기계로의식을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체험 기회를 거친 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과 달리 그곳에서는 젊고 건강한 신체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컴퓨터 속 영생이 너무 황당하게 들리지 않는다.
<샌주니페로>는 2017 에미상 작품상과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수작이자, 필자의 최애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스토리뿐 아니라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각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문화적 아이콘들이 재미를 더한다. 요키가 켈리를 만난 첫 시대는 87년이고, 이후 그녀는 켈리를 찾아 매주 다른 시기를 방문한다. 그때마다 각 시대를 대변하는 TV 광고, 전자오락, 히트곡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987년 요키는 ‘버블버블’ 전자오락을 하며 둘은 알렉산더 오닐의 ‘Fake’에 맞춰 춤을 추는데, 1980년에는 ‘팩맨’과 립스 잉크의 ‘Funky Town’이 이를 대신한다.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육체 대신,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삶과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샌주니페로>는 기술의 발달이 주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다. 만약 의식을 ‘카피 앤 페이스트(copy & paste)’ 할 수 있다면 동일한 내가 여럿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블랙미러>의 다른 에피소드들 (<화이트 크리스마스>, <USS 칼리스터>, <블랙 뮤지엄>)은 이러한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끔찍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차피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커즈와일은 그런 미래가 2050년까지 구현될 수 있다고 예견한다. 30년 전 우리는 오늘날 누리고 있는 첨단 기술을 얼마나 예상하고 있었을까?
글 | 도영진
이십세기폭스 홈엔터테인먼트 코리아 대표, CJ E&M 전략기획담당 상무 역임
보스턴컨설팅그룹 이사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