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이안 감독의 2012년작 <라이프 오브 파이>는 바다 위에서 여러 동물들과 표류하게 된 인도 소년 파이(수라즈 샤르마)의 이야기이다. 파이 가족은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했는데, 정부 지원이 끊기자 함께 캐나다로 이민 가기로 한다. 하지만 캐나다로 가던 일본 화물선이 폭풍우에 침몰하고, 파이는 홀로 구명보트에 오르게 된다. 그곳에서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갈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다양한 모험을 겪으며 227일이 지난 뒤에야 구조된다.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과 시각 효과상을 받은 이 영화는 아름답고 신비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호랑이, 얼룩말, 오랑우탄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이지만,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좁은 보트 위에 떠 있는 장면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굶주린 동물들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구명보트에는 결국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만 남게 된다. 파이는 보트에서 살아남기 위해 호랑이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결국 주도적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이후에도 파이는 굶주림과 싸우며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몽환적인 바닷속 풍경과 미어캣들이 사는 사람 형상의 식인 섬 등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영화 말미 병원에서 화물선 회사의 직원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도저히 있는 그대로 회사 보고서에 쓸 수는 없다며 그에게 납득 가능한 이야기를 요구한다. 그러자 파이는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는 같은 경험에 대한 다른 버전의 기억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스토리로 기억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는 아무 연관 없이 일어난 단편적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 붙이고 나름의 해석을 가미하는 것이다. 만약 그 경험이 평범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많은 이들은 종교의 영역에서 그 설명을 찾거나 혹은 상식의 선에서 설명이 될 수 있도록 기억 자체를 왜곡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자신의 기억뿐 아니라 다른 이의 경험을 듣는 과정에도 적용된다.
파이의 첫 번째 이야기를 들은 화물회사 직원은 ‘바나나는 물에 뜰 수 없기 때문에’ 오랑우탄이 바나나 더미를 타고 보트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과학적인 증거를 들어가며 파이가 상식선에서 이야기할 것을 강요한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당연히 파이가 본인의 끔찍한 경험을 동물들과의 우화로 곡해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파이에게 이런 강요는 낯설지 않다. 그의 아버지(아딜 후세인)는 본인이 살아온 세상의 지식과 상식으로 파이를 교육한다. 짐승을 친구로 여기는 파이에게 아빠는 냉혹한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 리처드 파커가 양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게 한다. “짐승은 인간과 다르다…. 그걸 잊는 순간 죽는 거야. 리처드 파커의 눈에 보이는 감정은 너 자신의 것이 비치는 것일 뿐이야.” 하지만 파이는 주체적으로 상식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해석을 만들 줄 아는 아이였다. 부모가 준 이름이 싫어 파이라 이름 짓고,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3개의 종교를 가진다. 하나의 종교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상식에 굳건히 싸운다. 심지어 기독교를 만나게 해 주어 고맙다고 힌두교의 신에게 감사한다.
파이는 바다 위 보트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간다. 그곳에서 그는 동물들과 같이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조난자들과 있었을 수도 있다. 그는 같이 배를 탄 누군가를 죽여야 했고, 그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것도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그들 중 누군가를 잡아먹어야 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본 폭력과 생존의 본성은 짐승의 것인지 짐승의 눈에 비친 자신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고 싶었을 것이다. 식인이나, 어머니가 살해되는 혹은 살해하는 장면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리처드 파커와 목숨을 건 싸움은 배고픔에 지친 동물적 본능과 인간적 이성의 싸움에서 결국 이성이 승리했음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이는 정말로 동물들과 생활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날아다니는 물고기 떼를 잡아먹고, 미어캣이 사는 신비한 섬을 방문했다. 결국 뱅갈 호랑이 미스터 파커는 파이와 친구가 되었고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일들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바나나는 물에 뜰 수 없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이 글을 쓰면서 정말 궁금해서 바나나가 물에 뜨는지 실험을 해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글 | 도영진
이십세기폭스 홈엔터테인먼트 코리아 대표, CJ E&M 전략기획담당 상무 역임
보스턴컨설팅그룹 이사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