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에서 여자로’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아츠앤컬쳐] 조반니 벨리니는 1400년대 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화가로, 티치아노(Tiziano)나 틴토레토(Tintoretto) 같은 베니스 화가들에게뿐 아니라 북 이탈리아 전 지역에 걸친 수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회화적 기술과 예술성은 이탈리아 후기 고딕 예술로부터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에 이르기 까지 예술적 가교 역할을 한다. 그는 약 90년에 달하는 인생 동안 매우 광대하며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하는데, 그 시기 이탈리아인의 평균수명이 40-50세라는 것을 감안할 때1426년에 태어나 1516년에 사망한 그의 긴 수명은 매우 예외적이다.
벨리니는 베니스의 예술가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야코보 벨리니(Jacopo Bellini)는 유명 화가였으며 그의 형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역시 화가였고, 매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는 르네상스 시대의 으뜸가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점은 그가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을 뿐 아니라 파도바(Padova)에서 만테냐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들을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예이다. 벨리니의 화풍은 부친인 야코보의 영향 아래 시작되며 베니스와 피렌체 회화를 결합한다.
그의 부친은 한 때 피렌체에 거주하며, 그곳의 중요한 화가인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에게서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들을 배운다. 이 기술을 통해 아들 조반니는 드넓은 초원의 독창적인 풍경화를 개발하게 되며 이는 곧 수세기에 걸쳐 북부 유럽과 베니스 화파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벨리니에게 있어 가장 깊은 예술적 교류는 안드레아 만테냐와 이루어진다. 만테냐는 열정을 다해 벨리니에게 고전주의 형식 및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미를 가르친다. 또한 만테냐의 고장인 파도바에서 피렌체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고아출신의 화가인도나텔로(Donatello)의 예술 세계와 만나게 된다.
이로 그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예술의 장대함 속으로 빠져들게 되며, 한편으로는 만테냐에게서 고전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도나텔로에게서 피렌체 예술의 합리성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이유로 벨리니의 화풍에는 피렌체와 베니스의 융합적 르네상스가 표현된다.
우리는 종종 그의 시대에 대한 제한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은 기차와 버스, 차량으로 고속도로를 통해 서로 다른 도시들로 이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움직이며 살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는 사실로, 중세 후기나 1400년대 사람들의 이동성은 오늘날보다 훨씬 높았다.
예술가들은 여행이 쉽거나 단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새로운기법을 배우며 서로 간에 관계를 맺기 위해 더 많이 이동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는 베니스를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거슬러 올랐다고 한다.
조반니 벨리니는 플랑드르 화파의 화가들과 연분이 돈독했던 안토넬로를 만나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며 새로운 회화적 기법을 연마하게 된다. 그는 부드러운 사실주의를 사용한 화풍을 발전시키며 조르조네(Giorgione), 티치아노, 그리고 틴토레토와 같은 훌륭한 베니스 화가들에게 길을 열어준다.
1480년 그의 형이 코스탄티노플로 떠난 해로부터 벨리니의 경력은 성공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며, 1483년 정식 월급을 받는 베니스 공화국의 공식화가로 지명된다. 1487년에는 예술적 성숙도가 드러나는 매우 중요한 작품 ‘산 지오베의 제단(La Pala di San Giobbe)’을 그리게 되는데, 여기엔 비잔틴식 모자이크 영상을 배경으로 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영향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관련성을 기억해야 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은 베니스와 비잔티움 사이의 깊은 문화 예술적 관계를 보여주는 극명한 본보기이다. 제단의 예를 들어 그림에 나타난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o) 성인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대표작 중 하나로 메시나의 인용을 언급할 수 있으며, 또한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은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 양측으로부터 존경받는 성인이었다.
이처럼 조반니 벨리니는 항상 동방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북유럽 예술 간의 교접점을 보이는 방식과 기법을 사용했다. 벨리니의 작품 중에는 많은 양의 성모화가 존재한다. 그가 새로운 성모상의 도상을 위해 목판이나 그림 위에 스케치한 대부분의 밑그림들은 흔히 알려진 성화 표현법에 기초하여 표현되었다. 즉 성모는 성인들이나 그림의 기증자 혹은 투자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벨리니 작품의 중요한 요소는 바로 종교성으로 이는 그가 비잔티움 세계와 연관된 1400년대 베니스의 문화적 여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 아래 르네상스의 기독교관을 지닌 위대한 화가이며, 또한 풍경에 몰두 한 성스러운 관념의 전달자이기도 하다. 이를 표현하고자 그는 신성함이 아닌 고전성으로 풍경 안에 녹아 들은 종교관과 고전 세계의 기법을 사용하며 전통적 그레코-로만 양식의‘신들의 향연(Festino degli dei)’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의 모든 예술적 기법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은 현재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 Museum)에 소장된 ‘거울 앞의 벌거벗은 여인’이다. 이는 노년기인 1515년에 탄생하며 종교적인 주제와는 별개로, 한 방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나체의 여인을 볼 수 있다. 여인의 형상은 그레코-로만 양식의 고전적 여성상을 떠오르게 하는데 그녀의 어깨 뒤에 걸린 거울에는 풍성한 머리칼을 덮은 망건이 비춰지며 마치 조각상에 견줄 만큼 유일한 완벽성을 보인다.
거울이 걸린 벽면은 검은색으로, 보다 선명하게 형태의 특징들을 살리는 메시나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전형적 영향이 인용되었다. 왼쪽 뒷면의 창문을 통해 플랑드르 지방과 거의 흡사한 풍경과 창틀 위의 투명한 꽃병이 보이는데, 이는 머지않아 ‘정물화’라 불리게 될 새로운 화풍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즉, 과일, 꽃 혹은 일상의 생명이 없는 사물을 주제로 대부분 그릇이나 물병 혹은 꽃병들을 표현한 1600년대 회화의 화풍을 말한다.
또한 젊은 여인은 값비싼 옷감 위에 앉아 있다. 여인의 모습은 성모들을 표현한 타 작품들과는 달리 관능적인 이미지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에 노년 화가의 비범함이 보인다. 성모, 즉 종교적 여성상의 거룩한 모습은 지상의 여인상으로 변모되며, 이 아리따운 젊은 여성의 형상은 성스러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 여인의 풍만함은 유연하고 조화로운 고전적 여성상을 떠오르게 함으로 육감적인 모습보다는 도리어 신성한 여성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이 작은 그림에는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에 이르는 아니, 모든 서양 예술사의 유산으로 남을 상징과 인용, 그리고 기법이 집합되어 있다. 성모와 같은 성스러운 형상이 젊은 여성의 명백한 아리따움을 통해 세속적이 아닌 거룩함으로 변환되는 것, 그 반대로 세속적인 젊은 여인의 육감적이며 관능적인 모습이 종교적으로 격상되어 거룩한 형상으로 뒤바뀌는 것, 이러한 것들은 오로지 서로 다른 문화적 공간을 거슬러 계속적인 변화를 시도한 광대한 예술성의 뛰어난 화가 조반니 벨리니 만이 실현할 수 있었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예술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Basera Roberto Pasi
Journalist, Doctorate Degree University of Siena(Literature, Philosophy, History of Art with honors), Study at Freiheit Unverisität Berlin, Facilitator at Osho Resort, Poona Ind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