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menico Beccafumi
[아츠앤컬쳐] 1400~1550년대를 풍미한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및 조각가 중에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도나텔로, 벨리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는 로마, 피렌체, 우르비노 등 이탈리아의 성당들과 유명 박물관을 통해서 널리 잘 알려져 있다. 당대에 유명 화가이자 예술사학자인 조르지오 바사리(1511~1574)가 “불가능이 없는 변화무쌍한 인간”이라 정의했던 위대한 이탈리아인이자 시에나의 화가 도메니코 베카푸미(1485~1551)도 여기에 빼놓을 수 없다.
베카푸미의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이탈리아 역사와 관습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16세기 이탈리아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모든 예술 활동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루터와 개신교의 개혁이 기존 신앙심에 개입되었고,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과 같은 타 국가들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혹은 레오나르도와 같은 화가에 의해 그려졌던 르네상스적 인간, 즉 자신이 만든 세상과 세계의 중심에서 자신을 운명의 주인이라 여겼던 그 인간은 갑자기 깊은 정신적 위기에 처했다.
세상과 예술이 격변하는 중이었다.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거장들을 비난했다. 비율의 조화와 균형을 찾기 위해 탐구를 멈춘 오류와 각자의 구상과 감각 및 새로운 표현 방식들을 환기시키는 대신 그저 완벽한 비율과 조화의 세상만을 나타냈다는 이유로. ‘마니에리스티’로 불리던 이 새로운 예술가들은 르네상스의 전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의 거장들로부터 받은 유산의 규칙들을 부정하며 새로운 창조를 거듭했다. 도메니코 베카푸미는 이 새로운 예술 사조의 위대한 창시자였다.
베카푸미는 1486년 시에나의 시골 마을 발디비에나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시에나의 한 은행가이자 상인인 로렌조 베카푸미 밑에서 일했으며 그의 가족 전체가 로렌조의 거대한 경작지에서 일했다. 어린 소년 도메니코의 자질을 발견한 로렌조 베카푸미는 그의 후원자로 나서며 학업과 미술을 배울 기회를 베풀어 준다. 도메니코는 그의 후원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자신의 성을 베카푸미로 바꾸게 된다.
1507년 한 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도메니코가 그의 후원자 로렌조 베카푸미로부터 한 그림을 의뢰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현재 시에나의 작은 마을 몬테풀치아노에 전시되어 있으며 아마도 그의 첫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그림에는 몬테풀치아노 마을을 손에 쥐고 있는 도미니카 수녀 ‘산타 아녜제 세니’가 그려져 있다.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흔히 회화적 기술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이것은 회화의 공간 배치 개념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510년 24살의 베카푸미는 로마에서 2년을 머무르며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만난다. 그들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필립포 리피나 피렌체의 프라 바르톨로메오 같은 화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으며 그의 예술적 특성이 확립된다. 미켈란젤로와 그의 작품들은 베카푸미의 예술적 기초에 큰 영향을 미친다. 로마에서 쌓은 수련으로 풍부한 기술적 요소들을 가지고 시에나로 돌아온 베카푸미는 인간의 인체를 그린 일련의 작품을 내놓는다. 이때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병원의 임무도 맡게 되는데 이는 그에 대한 좋은 평가를 증명하는 사례라 볼 수 있다. 성공의 길이 열린 것이다.
‘토론토의 성 바울’은 1515년에 그린 작품으로 반고전적 구성의 시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베카푸미는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 화풍과 인물을 떠올리는 한 성인을 그리면서 동시에 배후의 인물들은 단순한 동작의 증인들이 아닌 감정과 느낌을 실제적으로 표현하는 인물들로 그려냈다. 여기에 베카푸미의 회화적 기술의 비밀이 될 새로운 색감과 색상의 대비 또한 엿보인다. 이 작품에서 베카푸미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색감의 선택, 소멸된 배경 속 풍경, 마치 공간이 용해된 듯 부정확한 윤곽선과함께 색채는 장식적 요소에서 표현적 요소로 바뀌며 감정적 순간의 분출로 표현된다.
몬테 올리베토의 베네딕트 수도원을 위해 그린 작품으로 오늘날 이탈리아와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일컫는 ‘성녀 카타리나의 성흔’은 캔버스 유화로,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익힌 모든 화법이 함축된 작품이다. 여기에는 다른 화가들의 인용과 함께 그 자신만의 충만한 표현력이 깃들어 있는데, 예를 들면 페루지노 풍의 소박함이 엿보이기도 하며,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에서 따온 도상학적 묘사를 바탕으로 라파엘로 풍을 인용한 뛰어난 화법의 성모가 돋보인다.
또한 이 작품에서 점점 더 흐려지고 불명확하며 불명료해진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림자를 사용한 화법과 늘어진 신체, 이미지에 따른 뜨겁거나 차가운 신랄한 색감, 더욱 불명료해진 배경 등을 통해 베카푸미는 ‘마니에리즘’의 위대한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 작품 후 그는 새롭고 혁신적인 색채와 그림자의 사용으로 화가로서의 원대한 경력을 시작한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1520년 작 ‘성모 벨란티’와 같이 감정을 전달하며 소통하기 시작하고, 어두운 배경의 사용은 등장인물들을 부각시켜 작품 안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체적인 개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는 카라바조의 선구자이다.
1530~1540년에 그는 피사와 로마를 자주 오가며 계속된 작품 활동을 한다. 당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 카를 5세를 위한 작품을 준비하던 시기에 친분을 쌓은 도리아 황태자의 작품을 위해 제노바에서 일하기도 한다. 그러나 베카푸미에게 제노바는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고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바사리의 말처럼 베카푸미는 자유를 사랑했고 간섭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특별히 풍부하고 생산적인 마지막 10년을 보낸다. 많은 임무 가운데서 1546년 빛과 색채의 유희로 가득 찬 최고의 작품 ‘사르테아노의 수태고지’가 탄생한다. 성모와 천사의 서로 다른 얼굴은 마치 르네상스의 라파엘로를 연상시키는 조화를 이루며 길고 창백한 얼굴은 순결함과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나 베카푸미의 다른 어떤 작품들 보다 가장 확연하게 르네상스 조화로운 어법과 공간 구성의 완벽성을 깨뜨린 것은 현재 피츠버그의 카네기 박물관에 전시된 1526년의 작은 템페라화이다.
‘안젤로 성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발현한 미카엘 천사’의 배경은 윤곽이 밝혀지지 않은 채 인물과 자연 그리고 건물 주위 모두 희미하게 되어 있다. 로마 또한 천사의 성에 자리를 내어주며 사라져 있다. 그러나 이조차 명료하지 않다. 모든 것이 연기와 같고 오로지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된 하늘과 땅 만이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진다. 바다 빛 하늘과 파스텔 톤의 명암은 우리가 르네상스라 부르는 모든 것과 정돈과 정의로 대변되는 인간에 대항한 위대한 혁명이다.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시에나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며 새로운 기법을 사용한 목판화와 납형법과 같은 예술적 실험들에 몰두하다 1551년 눈을 감는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시에나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예술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저널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