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대 최초의 여성화가
[아츠앤컬쳐] 서구 사회는 가부장적 사회이다. 고대 그리스의 예를 들자면 여성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했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청소년과 유사했다. 여성은 정부 관련 사업이나 투표를 위시한 공적인 일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었다. 물론 피타고라스의 여제자들이나 하이페시아(Hypatia) 또는 밀레토스의 아스파시아(Aspasia di Mileto) 등 일부 여성 철학가들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대(大)플리니우스(Plinio il vecchio)에 의해 소개된 타미리스(Timarete), 칼립소(Kalypso), 아리스타(Aristarete), 이아이아(Iaia), 올름바(Olympas) 등의 여성 화가들도 이 소수에 속하였지만 여성 예술가는 그저 예술사의 그림자처럼 존재했고 대부분의 그레코로만 시대 여성들은 뮤즈나 영감의 원천으로만 받아들여졌다.
여성에 대한 점진적 변화는 1400년대 비로소 법원의 구성을 통해 보이기 시작한다. 여성들은 노래하거나 시를 짓고 법원을 드나들며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 후반에 이르러는 화가들로 활동하며 유명해지기도 했다. 1500년대 후반의 화가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1593~1654)도 그 중 하나로 이탈리아 예술사와 여성의 역사를 새로이 쓴 인물이다.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는 1593년 7월 8일 로마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오라치오(Orazio Gentileschi)는 피사(Pisa) 출신의 후기 마니에리즘 화가였는데 로마에 이주한 후 카라바조(Caravaggio)의 공방을 통해 실력을 쌓아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 당시 로마는 카톨릭의 반혁명 시기에 놓여있었는데 이 상황은 오히려 예술 분야의 놀라운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 시기 시작된 바로크 사조는 건축분야의 발전 즉, 성당과 건물들의 복원 및 건축을 포함한 도시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때 바로미니(Borromini)와 베르니니(Bernini) 같은 건축가들은 로마를 변형시켰으며 위대한 카라바조는 예술사를 새로이 장식했다.
아르테미지아는 이런 시대적 환경에서 태어났다. 겨우 12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그녀는 아버지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며 자랐다. 즉각 그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화가로서 기능들을 갖추게끔 기본 기술을 전수했는데, 목판화의 사본들로 기술을 쌓은 그녀는 점차 실제적인 회화적 표현들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카라바조와 그의 작품들은 그녀의 회화풍을 완성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잊지말아야 할 것은 아르테미지아가 가정 내에서 한정된 그림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관행상 회화는 남성들만의 독점적인 것이었기에 그녀는 일반적인 남성 동료들의 학습 경로와는 동일한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규례와 관행을 거슬러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성공한 아르테미지아의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하겠다.
1610년 17세 때 그린 <수잔나와 장로들(Susanna e i vecchioni)>은 주제의 선택뿐 아니라 예술적 경향을 결정 짓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그림의 내용은 아름답고 젊은 수잔나가 목욕을 하는 동안 정원에 침입 두 노인들에게 추행을 당하는 장면인데 이 노인들은 정욕으로 가득 찬 두 명의 판사로, 수잔나가 순순히 그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발하겠다며 위협한다. 수잔나의 거절에 그들은 그녀가 어린 남자와 놀아났다고 거짓 고발하고 투석형이 선고되는 시점에 선지자 다니엘이 나타나 거짓을 밝힌다.
성경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이 주제는 1500년대 무수히 많은 유명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작품으로 탄생하는데 아르테미지아는 이 작품 덕에 로마에서 중요한 화가로 떠오른다. 고작 17세의 나이에 유명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그녀는 곧 아버지의 권유로 유명화가 아고스티노 타씨(Agostino Tassi)의 화방에서 훈련을 쌓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그녀의 예술뿐 아니라 삶 전체에 흔적을 남길 만한 큰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19세가 된 아르테미지아는 남성의 방식으로 성공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 예술가였다. 스승 타씨는 유혹을 일삼았고 그녀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급기야는 그녀를 강간했다. 그 후 타씨는 급히 결혼을 제안했지만 당시 기혼자였던 그의 신분이 들통나면서 결혼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아르테미지아의 아버지는 고소를 감행했다.
이 사건의 중심에서 아르테미지아는 1600년대 이탈리아 회화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Giuditta che decapita Oloferne)>를 그리는데 이 작품은 젊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자 유디트가 도시를 지킬 능력이 없는 남자들을 대신해 속임수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처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다른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하는 이 그림은 사실상 도시뿐 아니라 인간적 가치마저 지킬 용기가 없는 남성들에 대한 고발이자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의 은유적 표현이다. 그녀는 이 그림 안에 남성의 비겁함을 뛰어넘는 여성의 영웅적 모습을 담아내며 홀로페르네스에 의해 반복적으로 짓밟힌 유디트의 도시와 자신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비유한다.
카라바조의 영향력이 엿보이는 이 작품의 검은 바탕은 주요 인물들의 형태를 분명하게 강조하는데 그럼에도 1597년 발표된 카라바조의 <유디트>와는 큰 차이가 있다. 아르테미지아의 작품에는 유디트와 시녀가 함께 복수를 감행하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이는 카라바조의 장면보다 훨씬 더 강렬하며 여기엔 그녀의 분노와 결단에 관한 심리적 회화가 거론된다.
무엇보다 배신으로부터 살인까지 당한 인간 홀로페르네스의 고통 가득한 표정과 그의 목을 베는 아르테미지아의 담담한 표정의 대비는 우연적이 아닌, 이는 스승 타씨로부터 받은 아르테미지아의 고통과 분노의 과정을 추측할 수 있는 대칭적 장면이다. 당시 타씨는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객들 덕분에 처벌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는 시나 어문들을 통해 매춘부로 묘사되며 치욕과 불명예를 떠안고 고통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 후 아르테미지아는 로마를 떠나 피렌체에 정착하여 아버지가 소개한 무명의 화가와 결혼한다. 이 급작스러운 결혼은 그녀에게 뜻밖의 새로운 영화를 안겨주었는데 당시 피렌체는 예술에 대한 개방적 사고를 지닌 코지모 2세(Cosimo II)의 계몽 정치 덕에 생동감 넘치는 예술적 도약기를 거치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르테미지아는 갈릴레이(Gallileo Galilei)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조카를 통해 후원자들을 만나 피렌체의 상류사회에 진출한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오직 저명한 예술가만이 입회할 수 있는 미술 아카데미(Accademia del Disegno)에 이름을 올렸고, 1620년까지 피렌체에 머물다 결혼생활의 파경과 함께 로마로 돌아간다.
로마에서 유명 화가로서 성공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아르테미지아는 또다시 불행한 과거를 기억나게 하는 작품 <유디트와 시녀(Giuditta e la sua ancella)>를 내놓는다. 카라바조의 모든 회화적 유산을 계승하는 이 그림은 그녀의 후기작들과는 다른 특별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림 속 인물들의 주시점으로, 인물들 중 그 누구도 그림의 정면 너머를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두 여성의 눈은 다른 방향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감상자는 보는 것 이상으로 연상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 그림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회화에서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그림의 필수적 부분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존재’로서의 부재를 암시한다.
그녀는 런던에서 수년간 여류화가로 활동하다 나폴리에서 생을 마친다. 아르테미지아의 탁월함은 단지 회화적 기술뿐 아니라 성서와 역사 속의 용감하고도 영웅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회화한 것이며, 암흑과 학대를 감내한 여성의 위대함을 그림 속으로 불러온 것이다.
번역 | 길한나 백석예술대학교 음악예술학부 교수
글 | 로베르토 파시
저널리스트

